한번은 祖國 楚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향을 찾았는데, 때마침 秋夕 무렵이라 그는 휘영청 밝은 달을 배경으로 구성지게 거문고를 뜯었다.
그때 몰래 그의 연주를 엿듣는 허름한 차림의 젊은 나무꾼이 놀랍게도 그의 음악을 꿰뚫고 있었다.
伯牙는 깜짝 놀랐다. 그가 山의 웅장한 모습과 激流(격류)의 우렁찬 기상을 표현하자 나무꾼은 정확하게 맞히었다. 伯牙는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당신이야 말로 진정 소리를 아는(知音) 분이군요."
그는 種子期(종자기)라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고 내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서 헤어졌다. 이듬해 伯牙가 種子期의 집을 찾았을 때 그는 이미 죽고 없었다. 種子期의 묘를 찾은 伯牙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최후의 한 곡을 뜯었다. 그리고는 거문고 줄을 끊고 산산조각 냈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故事)다. 이때부터 '知音'은 마음까지 통할 수 있는 '절친한 친구'를 뜻하게 되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얽힌 '침략과 배신의 환술' 2013-04-30 CBS 변상욱 대기자 via 변상욱의 기자수첩
○ 왜 신사참배가 문제인가
일본의 신도(神道)는 사람 사는 일과 온갖 자연현상을 관장하는 신이 곳곳에 널려 있다고 믿는 일본의 고유 종교이다. 신사에 모시는 각종 신이 800만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이런 신들을 모신다고 하는 곳이 신사이다.
신도를 따르는 일본인들은 태어나서부터 일생동안 신사에 가서 참배를 하고 가정에도 신단을 두어 일상을 함께 한다. 우리나라의 성황당이 국가적 종교로 발전했다면 이런 모습일까? 종교를 창시한 교조도 없고 경전도 없다. 그러나 일본인의 삶 밑바닥에 강력한 힘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절대 간과해선 안 된다.
야스쿠니 신사는 근대 일본이 치른 내란과 전쟁에서 숨진 전몰자들을 신으로 승격시키고 그 명부를 보관한 신사(묘지가 아님)이다. 246만 명의 신령이 된 인간을 제사지내는 곳이다. 여기에 태평양 전쟁의 A급 전범 14명이 포함되어 있어 국제사회는 이를 경계하며 지켜봐왔다.
그러나 문제의 근원은 A급 전범에 대한 참배가 아니다. 전범에 대한 참배와 추악한 과거에 대한 미화작업이 가져 올 미래의 불행이 무엇일지에 집중해야 한다.
종교와 관련한 일본 역사의 특징 중 하나는 개방과 배척이다. 외국에서 다른 종교가 발전해 일본으로 수입되면 일본인들은 쉽게 문을 열어 맞아주고 자기들 전통신앙과 섞어버린다. 그러다 융합작업이 끝나면 밖에서 들어 온 종교를 솎아내 묻어버린다. 에도 시대에 유교는 유교신도론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불교는 ‘신불(神佛)습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토사구팽 당했다.
불교의 예를 살펴보자. 일본에 불교가 들어와 절이 세워지자 일본은 절을 지키는 신사를 세우고, 신도에 모신 신들에게 보살 칭호까지 붙이며 불교에 신도를 접목시켰다. 그러다 민족주의를 내세워 신도가 불교를 누르기 시작했고, 메이지 유신 때 신도와 불교를 철저히 분리시킨 뒤 불교에 대한 파괴공작이 벌어졌다. (불교유입 - 신도와 융합 - 융합된 신도를 종교화하고 불교 배척. 애초에 종교화된 원인이 없어지는 황당한 상황)
신도가 일본의 군국주의와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파시즘 체제로 바뀌면서 일본의 불교도 군국주의에 순응해 타락의 길을 걸었다. 침략을 일삼는 제국주의 군대를 선전하며 전투 의지를 북돋우는 역할을 맡았고 일왕(천황) 숭배를 부르짖었던 것.
"…집착을 버려라, 생과 사가 다르지 않다. 네가 죽이는 것과 저 사람이 죽는 것은 다 업에 의한 것이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전사하면 내세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식의 설득에 의해 병사들은 자살특공대가 되고 침략지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자기 자신을 변명했다.
신도와 불교가 이렇게 사상적.종교적으로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뒤에도 전범들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고 자기들이 정당했고 구원 받아 극락왕생할 것이라고 버텼다. 또 그 뒤를 잇는 정치지도자들이 서슴없이 망언망동을 일삼는 것이고 일본 국민들이 이를 옹호하는 우경화의 길로 기울어 가는 것이다.
일본은 기독교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이용하고 임진왜란에 동원한 뒤 엄청난 학살과 박해로 제거해버렸다. 대한제국에 접근해 을사보호(?)조약, 내선일체라는 논리를 내세워 한반도를 수탈했고, 모두가 평등한 황국신민이라며 징용.징병.학살로 우리 민족을 짓밟은 것도 마찬가지로 겉과 속이 다른 토사구팽의 저팬 스타일이라 하겠다.
○ 일본 신사가 모시는 神은 일본 그 자체
그 핵심에 야스쿠니 신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일본 신도의 ‘신’(神)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신과 다르다. 바람의 신, 숲의 신, 음식의 신, 조상 신…. 즉 일본국 및 일본인들과 관련된 모든 것이 신이 된다. 신도가 섬기는 신은 현실을 넘어 선 절대적인 신, 즉 인류 모두에 대한 보편성이나 영원성에 기초한 신이 아니다. 일본이라는 나라, 일본인이라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는 신이며 일본국과 일본 왕족, 귀족의 현실과 이익 자체가 신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일본의 신사는 천황과 황족을 신으로 떠받들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귀족, 장군들이 추가 되었다. 그 이후 일반 국민이 국가에 의해 신으로 대접받는 유일한 통로가 생겼는데 그것은 일본 왕을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다.
어떤 인생을 살았건 문제되지 않는다. 일본 왕을 위해 죽으면 된다. 그런 이유로 야스쿠니 신사에서 떠받드는 신은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진압, 시베리아만주 정벌,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을 치르며 숨진 사람들로 계속 대상자가 늘어왔다. 그렇게 246만 명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렇게 국가적 전란에서 사망한 사람들을 초혼의식을 통해 신으로 승격시켜 대접하며 일본 군국주의와 천황제, 국가신도체제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맡았고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이게 바로 일본의 군국주의 실체이다)
일본의 국립군사박물관이 그 안에 있다. 일본 최대의 도검진열장이자 전사자 유품, 전리품, 각종 병기를 전시한 군사적 계몽시설이다. 여기에는 자살 병기들을 진열한 코너가 따로 있고, 6천 명의 자살영웅들을 기리는 설명문이 붙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육군 장교클럽 본부도 있었다. 애국부인회 본부도 있었고, 일본제국 재향군인회 군인회관도 있었다. 일본이 전쟁을 반대하는 국민여론을 잠재우고 국가총동원령을 밀어 붙이려 계엄령을 선포했을 때 계엄사령부로 쓰였다. 일본 내 호국영령을 제사 지내는 호국신사는 내무성 소관이지만 야스쿠니 신사는 해군성과 육군성 소관이다.
야스쿠니 신사에 제신 처리된 전몰자는 246만 명. 그 유족과 자손들을 합치면 얼마나 될까? 엄청난 규모가 된다. 또한 신도는 일본인 모두의 삶이다. 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일본의 우경화를 더욱 부추긴다. 결국 일본인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신도와 신사는 새로운 침략적 이데올로기의 발흥을 돕게 된다. 이것이 야스쿠니 신사가 갖는 21세기의 의미이다.
* 최근 학생들이 그랬단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Gentelman 을 말하는 것이냐고.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이 참말로 한심하다.
독일은 주5회 역사수업을 받는다. 이 정도는 못할 지언정 수업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을사불평등조약이 무엇인지 묻는 때가 오지 않을까 싶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동학혁명 119주년 2013-04-26 CBS 변상욱 대기자 via 변상욱의 기자수첩
동학농민혁명은 인도의 세포이 반란, 중국 태평천국의 난 과 함께 근대 아시아 3대 민중혁명으로 일컬어진다. 세계사로 따져도 19세기 중 최고의 격을 갖추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민중대혁명이다. 세계 4대 근대시민혁명을 꼽으면 동학농민혁명과 프랑스 시민혁명, 독일 농민혁명, 중국 태평천국의 난이다.
동학혁명이 내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
외세를 배격하고 신분제도 철폐 등을 내세워. 내적으로는 자주와 평등을 외친 우리나라 근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멸시와 모멸이 없고 인간의 귀천이 따로 없는 세계
불평등, 멸시, 천대를 운명으로 알고 살아가던 백성이 차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경험했다는 것은 충격이고 가슴 벅찬 일이었을 것. 그러나 봉건왕조의 정치권력은 이를 좌도라며 탄압을 시작했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을 부정하고,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대우하며, 어린이를 인격체로 보며, 노비들을 해방한다는 것은 조선 왕조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탄압 속에서도 동학의 이념은 전국에 퍼져 나갔다.
관청과 포졸들의 감시를 통해 번져 가던 동학은 1893년 3월 11일 충북 보은에서 전국 대회를 갖는다. 2만3천여 명의 동학도가 모여 성을 쌓고 진지를 만들어 관군의 진압에 대비해 방어태세를 갖추고 20일 간 대회를 치렀다. 선비, 농민, 남성, 여성 모두가 평등한 자격으로 민주적인 대토론을 이어갔고 비폭력 원칙 아래 동학의 나아갈 바를 밝혔다.
탄압과 수탈이 계속되면서 그 다음 해 1월 전북 정읍 고부봉기가 일어나 관아를 습격했다. 3월 전북 고창 무장기포에서 농민군이 정식으로 결의문을 발표하고 전국 봉기를 선언하며 조직적인 대오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 뒤 전북 부안 백산 봉기에서 농민군의 편제가 갖춰져 본격적인 혁명군의 진용을 이룬다. 앉으면 죽산, 일어서면 백산이란 신화가 여기서 시작되었다.
그 뒤로 전북 정읍 황토현(덕천면) 전투 승리를 발판으로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해 승기를 이어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밀리면서 공주 우금치전투 패배로 궁지에 내몰린다. 패전을 계속하다 마지막 전투를 치른 곳은 본부가 있던 충북 보은이다.
친일개화정권이 일본군에게 농민군 진압을 부탁했고, 조선정벌을 꿈꾸던 일본은 어차피 나중에라도 장애가 될 동학군을 모두 살육하는 걸 목표로 했다. 1894년 11월부터 4달 사이에 학살된 농민군이 최소 3만 최대 5만까지 추산된다.
동학을 진압한 일본은 청일전쟁을 거쳐 조선조정을 을사늑약으로 삼켜 버린다.
허리우드 영화 두 편을 떠올려 보자.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링컨' - 1860년대 남북전쟁을 다룬 영화이다. 톰 크루즈가 주연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미국이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엄청나게 발전한 무기와 전쟁기술을 일본에 팔아먹고 일본군을 훈련시켜주는 과정에서 미군 장교가 사무라이가 된다는 가상의 이야기.
미국의 무기업자들이 일본 왕실을 꼬드기고 외교적으로 압박해 일본에 총과 대포를 판다. 이 총과 대포로 내부를 정리한 일본은 미제 총과 대포를 들고 섬 밖으로 나가 휘두르는데 그 첫 무대가 조선 동학농민군의 학살이다.
일본의 우경화나 망언을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역사적 배경이 이것이다. 욕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미국, 중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연대도 중요. 요즘은 무기가 안 되니까 환율 가지고 말썽 피운다.
동학을 앞에 붙여 동학혁명, 동학운동, 동학혁명운동, 동학농민혁명이 있다. 동학을 앞에 붙이지 않은 용어로서 갑오농민전쟁, 갑오농민봉기, 1894년 농민전쟁, 그리고 갑오동학농민운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2004년 2월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으니 공식 명칭은 '동학농민혁명'이 적절하다. 굳이 동학이란 단어를 피하려는 배경은 동학이란 말이 1894년 당시 조선 왕조의 정치권력과 양반유생들이 사교가 백성을 현혹시켜서 일으킨 변란이라는 의미로 동학이라 일컬었기 때문이다.
110년이 흘러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2007년 1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무장기포를 동학기념일로 정하려 했으나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날이 혁명을 전국화 시킨 결정적 계기이므로 이날로 하자는 사람들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지금까지 기념일 제정은 미뤄져 오고 있다.
한편 박정희 전대통령의 아버지가 경북 선산 지역 동학 접주였다고 알려져 왔다. 22살 때 동학의 지역 간부를 맡았다가 체포됐고, 간신히 사형을 면해 고향으로 내려가 일생 술로 시름을 달래며 살아가다가 40대 중반에 박 전대통령을 낳았다고 한다.
* 이런 일본의 만행을 당한 아버지 밑에 일본군 장교가 나왔으니.. 거 참.. 게다가 민주주의를 쫓던 아버지와는 달리 민주주의를 핍박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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