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마르 카다피

2011/08/24 10:38

리비아의 정치인으로,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현재까지 리비아의 국가 원수로 있다. 가다피라고도 부른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불리는 한편, 사막의 미친 개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도 있다.

1977년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체 구축을 명분으로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지, 전제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철저히 반미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등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한 카다피는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강력하게 탄압했으며 이에 맞서 알 카에다는 수차례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다.

* 위키백과 발췌

2011/08/24 10:38 2011/08/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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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잘 표현하는 잘못된 사고 방식

2011/08/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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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말..
좋은 나라에 살고 싶은데 말입니다...
 
착찹해지는 영상입니다..

안철수박경철씨..
두분같은 분들이 행동하여 좋은 나라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주셔야 합니다...


2011/08/24 10:37 2011/08/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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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 크리슈나무르티

2011/08/24 07:27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2007/10/29 16:35

Jiddu Krishnamurti
인도출신의 세계적 명상가이자 철학자.
철학서로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있다.

크리슈나무르티는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및 종교 스승들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어떤 철학이나 종교를 내세우지 않고, 일생생활 속에서 갖는 우리 모두의 관심사들, 즉 폭력과 부패로 가득 찬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는 문제나 안전과 행복을 위한 개인의 탐구, 그리고 사람의 공포, 불안, 상처, 슬픔 등과 같은 내면적인 부담으로부터 스스로를 벗어나게 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그는 마음의 미묘한 움직임을 아주 정밀하게 파헤쳐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특질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도입해야 할 필요성을 지적했다.
크리슈나무르티 자신은 어떤 종교나 종파 또는 나라에 속하지 않았다. 정치적, 이념적 사상을 내세우는 어느 학파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는 이런 것들이 사람과 사람을 분리시키고 분쟁과 전쟁을 일으키는 요소들이라고 주장했다.


* 링크1 홈페이지
* 링크2


2011/08/24 07:27 2011/08/2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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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왈도 에머슨

2011/08/24 06:56

랄프 왈도 에머슨  2007/10/29 00:00

Emerson, Ralph Waldo

미국의 철학자이며 시인.
처음에 성직에 있었지만 교회와 충돌하고 1835년 이래 뉴햄프셔 주의 콩코드에 거주하였으므로 '콩코드의 철학자'로 불리운다. 
정신과 물질의 관계를 철학의 영원한 문제라 하고 초월론을 주장하였다.
인식에서는 직관주의의 입장에서 사물의 본질이 파악될 수 있다고 보고, 역사에 관해서는 위인이 사회의 진보를 초래하며, 이 진보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회에서의 부자와 빈자의 대립은 영구적이라고 하면서, 그 자신은 빈자의 편에 서서 부자(부르주아)를 비난하였으며 또 미국의 흑인 노예의 존재에 대해 반대하였다.

*
자주 그리고 많이 웃는 것
현명한 이에게 존경을 받고
아이들에게서 사랑을 받는 것

정직한 비평가의 찬사를 듣고
친구의 배반을 참아내는 것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건강한 아이를 낳든
한 뙈기의 정원을 가꾸든
사회 환경을 개선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친구란 자연의 걸작이라 간주될 수 있다
"a friend may well be reckoned the masterpiece of nature."




2011/08/24 06:56 2011/08/24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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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 다 갔어요오~

2004/12/2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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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호. 감독님 장가 다 갔어요~
그래두 누군지 밝히지는 안을테니, 위안 삼으세요 호홋~

근데 난 대체 왜 저렇게 나온것이야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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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20 23:31 2004/12/20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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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Tati

2004/12/14 19:14

Jacques Tati is one of the great comic icons of French cinema, a Gallic equivalent of Charlie Chaplin or Buster Keaton. (via Nugget Media)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과 같은 급의 거장으로 여겨지는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특별전 같은 걸 해주지 않는 것일까. (About Tati) 우연히 어느 영화를 통해서 알게 된 이 감독의 작품을 꼭 한 번 보고싶다.

# 확인해보니, 99년에 문화학교 서울에서 <단편영화제>라는 주제로 그의 작품을 상영했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해줄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메일을 보내봐야겠다.

2004/12/14 19:14 2004/12/14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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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실은 베이컨이다

2004/11/06 22:31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에서 태어난 극작가이다.
1585년 경 런던 극장에서 일하면서 배우로서 무대에 서고 극작가로서 대뷔한다. 1592년 경부터 극작가로서 인정받아 약 20년 동안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세익스피어의 극은 궁정 사회나 생활사정, 의학적 지식, 법률, 박물학, 여러 외국 정보에 정통하고 희대의 교양을 갖춘 자가 아니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한 일부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이라는 촌에서 결코 유복하다고 할 수 없는 집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 이후 독학을 한 흔적도 없는 그가 실제 작품을 쓴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혹을 갖게 되었다.
1592년경부터 극작가로서 인정되었지만 1985년경에 런던으로 간 무지한 시골 청년이 7년 만에 희대의 박학을 갖추는 일이 정말 가능했을까. 다른 정서적인 작가의 흉내라면 몰라도 그 희대의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ㅡ. 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문호 세익스피어가 성 트리니티에 잠들어있는 그 남자가 아니라면 진짜는 누굴까. 연구하기 시작한 그들은 당시 박학다식하고 세익스피어 극을 쓸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렌시스 베이컨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프렌시스 베이컨은 16세기 영국에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당시 런던 교외였던 스트랜드의 요크하우스에서 태어났다. 베이컨의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국새상서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것은 국왕의 다음가는 요직(총리대신, 국새상서, 대주교) 중의 하나이다.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베이컨은 12살에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2년 후 캠브리지를 중퇴하고 그레이즈 인(법학원)에 들어간다. 아버지와 같은 법률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3개월 후 아미아스 포레트 경이 주불 대사에 임명되자 베이컨은 수행원으로 그를 따라 프랑스로 간다. 파리 체제 중, 외교관으로서의 일을 익힐 겸 농업이나 정치학, 금속, 지질학 등을 공부하였다.
1579년 폐렴에 의한 아버지 니콜라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런던으로 돌아온다. 8명 형제에 의한 유산 분배는 당시의 관습대로 장자가 상속, 베이컨은 약간밖에 받지 못했고 고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 1616년까지의 약 37년 간이나 베이컨은 빚으로 고생하게 된다.
베이컨은 21살에 법정변호사의 자격을 취득하고 궁정에 자리를 요청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1584년 하원의원이 되지만 계속 빚에 시달린다. 159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고문관이 된다. 이걸로 드디어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보겠지만, 베이컨의 결정적 출세의 방해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너무나 권력에 집착하는 베이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데에 있었다.
그 후에도 빚은 늘어나기만 했고 1598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한 때 구속된 적도 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6세가 즉위한다. 1604년 제임스의 왕실변호사가 되지만 그건 소위 명예직 같은 것이며 실제 수입이 많지는 않았다. 1607년 드디어 법무차관이 된다. 1611년 베이컨은 법무장관이 된다. 그리고 정적 에드워드 코크의 실각이후 1616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어 드디어 염원하던 출세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4월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죽었다. 다음 해, 베이컨은 아버지와 같은 국새상서가 된다. 그 후 대법원이 되고 다음 1618년 대법관에 임명되어 남작의 직함을 얻는다. 1621년 공직을 은퇴하고 집필 활동에 전념,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6년에 서거.

진짜 세익스피어 A - 성 트리니티 교회에 잠든 세익스피어 B - 베이컨 C
A는 B일까 C일까.
당시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연극은 인정받지 못했다. 길거리 약장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나 매춘과 비슷한 정도의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B가 A라면 왜 마을로 몰래 돌아가 조용히 죽은 것일까. 왜 런던에서의 성공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B는 이름은 빌려줬지만, A가 아니기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A가 C라고 가정해보자.
특권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출세욕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출세욕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법률학의 정점에 다다르는. C가 A라 고백하지 않은 이유는 극작가가 아직 매춘과 동등 정도의 직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에 자살행위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베이컨은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극작가가 되었던 것일까.
야심에 넘치는 그도 돈 문제로 늘 고민했는데, 돈을 꾸는 곳은 언제나 형 안소니에게서였다(안소니가 남긴 날짜가 들어간 차용서는 다수 발견되었다). 베이컨이 50대에 출세하기 전까지 형 안소니가 650파운드는 빌려줬을 거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계산해봐도 형 안소니로부터 받은 원조의 세배는 필요했을 거라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거의 제대로 된 수입이 없었던 베이컨은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A=C 이다는 설에서의 결정적 가설.
C와 B는 어찌하다 알게 되었다. B는 배우출신의 보잘것없는 극작가였다. 그래서 계약금의 절반을 받기로 약속하고 C는 B의 이름을 빌려 A의 작품을 쓴 것이다. 아무리 A가 유명해져도 B도 C도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B가 A라고 하면서 세상에 넉살좋게 나온다면 B의 무지가 탄로가 나, 그 결과 C도 드러나가 될 것이다. 약속은 지켜졌고, B는 A에게 받은 돈으로 약간의 돈을 모으게 된다. 그것을 갖고 B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한 노후를 즐기고 숨을 거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1611년 '헨리 8세'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그만뒀다. 이 해에 베이컨은 염원하던 법무장관이 되었다.

ZERO (아이 에이씨 作) - 문호 세익스피어 편

세익스피어는 실은 다른 사람이고 존재하지 않았다 는 설은 모든 국민의 가장 성스러운 신념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단언하는 영국인의 반감을 살 것이다. 하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가절이 아닐 수 없다.

ZERO



2004/11/06 22:31 2004/11/06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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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귀에서 맴도네요

2004/06/15 14:06

사랑해! 오빠 - 조중동 연가 -
작사작곡 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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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민석씨는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서문.
조선 통치사의 새로운 기원을 이룬 것이자
미나미 총독의 일대 영단 정책 하에
조선에 육군특별지원병제도가 실시된 것에 대하여
이미 본 란에 수차 우리의 찬성의 뜻을 밝힌 바 있거니와
종래 조선 민중의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못하고 있던
병역의무를 실현케 하는 것이다
황국신민 된 사람으로 그 누가 감격치 아니하며
그 누가 감사치 아니하랴
황국에 대하여 충성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국방상 완전히 신민의 의무를
다 하여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38년 6월 16일 자 사설

3절.
자기의 이익을 위해선
친일도 독재 찬양도 서슴지 않고
자기 뒤를 봐주는 놈에겐
그 어떤 죄악도 눈을 감아주지

반공이라는 썩은 칼을 들고
공갈치고 협박하는 조폭신문
고마해라 마이무따 고마해라
(어머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전체가사



2004/06/15 14:06 2004/06/15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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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와즈 사강

2004/05/31 15:27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 카자르크 출생. 아버지가 실업가인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소르본대학교(지금의 파리대학교)를 중퇴하였다. 19세 때 발표한 《슬픔이여 안녕 Bonjour Tristesse》(1954)이 전례 없는 베스트셀러가 되어 문단에 데뷔, 이로 인해 그해의 문학비평상을 받았다. 23세 때 결혼하였으나 곧 이혼하고, 27세 때 재혼을 하여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다시 이혼하였다. 그녀는 현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을 계속하고 있는데, 남녀간 심리의 섬세한 움직임을 담담한 필치로, 미묘한 분위기와 권태를 자아내면서 묘사하는 그 작풍은 세계 각국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으로 소설 《어떤 미소 Un Certain Sourire》(1956), 《한 달 뒤, 한 해 뒤 Dans un mois, dans un an》(1957), 《브람스를 좋아하시나요》(1959), 《신기한 구름》(1961), 《뜨거운 연애》(1966) 등이 있고, 희곡으로는 《스웨덴의 성(城) Un Chteau en Sude》(1960), 《바이올린은 때때로》(1961), 《발란틴의 연보랏빛 옷》(1962) 등이 있다. 또 발레 각본과 샹송 가사도 썼다. 그러나 50대에는 두 번씩이나 마약복용혐의로 기소되었으며, 타인에 피해가 없는 한 자신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 파문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2004/05/31 15:27 2004/05/3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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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Randolph Hearst

2004/05/31 14:36

19세기와 20세기 초입을 '옐로우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 논쟁으로 미국을 뒤흔들었던 인물, 허스트. 별칭으로 신문왕 허스트라 부르기도 한다.

* 옐로우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
대중의 원시적 본능을 자극하고 호기심에 호소하여 흥미본위의 보도를 하는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 경향을 띠는 저널리즘. 신문이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논리가 심화됨에 따라 상품화 됨으로써 대중에 영합, 취재.보도하는 내용이 점차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나 괴기사건(怪奇事件), 성적 추문 등의 선정적인 사건으로 채워지고 이를 과도한 비중으로 다루는 현상을 일컫는다.

1889년에 J.퓰리처가 《뉴욕 월드》 일요판에 황색의 옷을 입은 소년 ‘옐로 키드(yellow kid)’ 만화를 게재하였는데, 이를 흉내낸 W.R.허스트의 《모닝 저널》과의 사이에 선정주의(煽情主義:sensationalism)의 치열한 경쟁을 전개함으로써 이 호칭이 생겼다. 그 이후 선정적 기사를 게재하는 신문을 옐로 프레스(yellow press) 또는 옐로 페이퍼(yellow paper)라 부르게 되었다.

즉,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 괴기사건(怪奇事件), 성(性)적인 기사등을 과대하게 취재,보도하는 신문의 경향을 말한다. 이는 신문의 무조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한 노력에서 나타난 부산물인 것이다.

옐로저널리즘의 특징은 편집에 있어서 대형의 제목을 사용하고, 사진의 과다한 사용이 특징이며 내용에 있어서 모든 방면에 선정주의 적인 사실을 소재로 하고 만화 또는 천박한 내용의 기사를 주로한 일요특집이나 부록을 발행한다는 것 등이다.

이후 선정적 기사를 게재하는 신문을 가리켜 옐로 프레스(yellow press) 또는 옐로 페이퍼(yellow paper) 라 부르게 되었다.

2004/05/31 14:36 2004/05/31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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