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뮌히, 아우슈비츠의 선인

2024/07/08 19:03

한스 뮌히 / 한스 빌헬름 뮌히 (독일어: Hans Wilhelm Münch, 1911년 5월 14일~ 2001년 12월 6일). aka. 아우슈비츠의 선인

-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무장친위대 소속 군의관으로 복무
-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대량학살에 최대한 참여하지 않으려 했기에 소위 "아우슈비츠의 선인"이라고 불렸다. 전후인 1947년 크라쿠프에서 열린 아우슈비츠 재판에서 아우슈비츠 생존 수감자들의 변호에 힘입어 피고인들 중 유일하게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2024/07/08 19:03 2024/07/08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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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마 그레제 / 이르마 아이다 일제 그레제 (독일어: Irma Ida Ilse Grese, 1923년 10월 7일 ~ 1945년 12월 13일). aka. 아우슈비츠의 금발의 천사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 악명을 떨쳤던 슈츠슈타펠 여성보조대원이자 여성 수용캠프의 감독관 및 여성 간수 지휘관. 수용자에게 잔혹행위를 하여 전범으로 처형되었다.

- 나치당에 가입하고 여간수학교에서 수업을 받은 후 레벤스르북 강제 수용소 임무를 자원하게 되었다. 다른 여간수들처럼 교육을 받은 후 1943년 3월에 그들의 주 근무지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이동하였다. 170명의 여간부 중 하나였으나, 아름다운 외모로서 우수한 게르만인의 표본으로 불리면서 '아우슈비츠의 금발의 천사'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 여성수감자 감독관으로서 3만명의 수용자들을 감독하였고, 여간부 서열에서도 2위를 차지하였다. 항상 들고 다니던 가죽채찍은 그녀의 상징이었다. 수감자들을 채찍과 부츠 등으로 때리고 고문하면서 군견에게 물어뜯겨 죽게 하거나,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즉결 사살하거나, 가스실로 보낼 인원들을 직접 골라냈다.

- 4월 17일에 요제프 크라머 등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영국군에게 체포되어 12월 13일에 베르겐 벤젤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영국군들은 그녀의 외모와 22세의 젊은 나이를 알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 1945년 12월 13일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사형 과정에 문제가 생겨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었다. 목뼈를 박살내 즉시 죽이는, 롱드롭식으로 처형되었는데 사고 때문에 천천히 질식사.


2024/07/08 18:59 2024/07/08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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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천사, 요제프 멩겔레

2024/07/08 18:38

요제프 멩겔레 / 요제프 루돌프 멩겔레 (독일어: Josef Rudolf Mengele, 1911년 3월 16일 ~ 1979년 2월 7일)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나치 강제 수용소의 내과의사
- 수용소로 실려온 수감자들 중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강제 노역에 동원할지를 결정하였으며 수용소 내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였던 것으로 악명이 높다. aka.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 독일어: Todesengel). 친절한 의사처럼 보이지만 하는 짓은 악마보다 더한.

-  1943년 5월 24일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집시 캠프' 의무관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 8월 수용자들이 모두 가스실로 간 이후 캠프가 해체되면서 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의 주임 의무관이 되었다.

- 멩겔레는 수용소에 있는 동안 수감자들을 이용하여 그의 유전학에 관한 연구를 지속하였다. 그는 특히 쌍둥이 연구에 관심이 많아서 이들을 선별하고 특별 병영에 따로 수용하여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쌍둥이들이 정말 뱃속까지 동일한지 확인하기 위하여 쌍둥이 아이들 중 몇 쌍을 선택하여 자신의 실험실로 부른 후 침대에 눕히고 잠을 재운 후 클로로포름을 심장에 바로 주사하여 즉사시킨 뒤 해부했다. 심지어 아이들은 이때까지도 자신에게 잘해주었던 그의 친절한 모습 때문에 "멩겔레 아저씨"라고 말하며 웃으면서 숨졌다. 그는 쌍둥이에 집착하여 쌍둥이의 장기나 혈액을 교환하기도 했고 남녀 이란성 쌍둥이를 근친교배하였다. 특히 그는 샴쌍둥이에 대한 집착을 보여서 평범한 쌍둥이들의 몸의 일부를 자르고 꿰매 인공 샴쌍둥이 비스무레한 것을 만들고(!) 얼마나 살아남는지 관찰하기도 했지만 연결시켰던 정맥이 염증을 일으키면서 아이들의 연결 부위가 썩어들어갔다.

- 임신 8개월의 임산부가 아우슈비츠에 들어오자 이상하게도 생체실험을 하지 않고 살려주었는데, "갓난아이가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로 며칠이나 살까?"를 실험하기 위해 그녀를 살려줬던 것이었고 결국 아이는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끝에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사하고 말았다.

- 멩겔레의 실험 대상이 된 이들은 필요에 따라 간단히 살해하고 해부하였다. 이들은 일반 수감자들보다 나은 주거 환경에서 보다 좋은 음식을 먹었으며 가스실에 갈 위험도 없었지만 멩겔레는 이들을 실험재료로 생각하였을 뿐. 그가 이토록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어린 아이들까지 생체실험을 위한 도구로 썼기 때문이다. 건강한 실험체를 확보하기 위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면 곧 바로  인체 실험을 실시했다. 이러한 실험으로 사망한 사람은 40만 명에 이른다.

- 전후 독일 내에서 가명을 쓰며 숨어지내던 멩겔레는 남미로 도주, 아르헨티나를 거쳐 1959년 브라질로 이주하였다. 그가 사망한 후에 알려졌는데 1985년 브라질의 어느 무덤의 주인이 멩겔레라는 소문이 퍼졌고, 발견된 유골의 사진과 무덤 속에 남겨진 치아의 DNA 등을 분석한 검사로 1993년 신원이 확인되었다.


2024/07/08 18:38 2024/07/0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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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 아돌프 아이히만(독일어: Otto Adolf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6월 1일)의 재판을 일종의 리포트 형식으로 정리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아이히만은 1932년 나치의 등장 후 나치당에 가입하여 친위대로 활동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하지 않았던 그는 졸업후 여러회사를 전전하며 일하는 동안 나치당의 신문을 접해 읽기 시작했다. 신문을 통해 아이히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베르사유 조약 조건 거부, 급진적인 반-유대주의와 반-볼셰비키 등을 접하게 되었고, 나치당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 인종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 형성, 유대인 시민권 박탈과 적극적인 탄압으로 인종 청소를 약속했다.

1934년 베를린에 본부를 둔 부서 Section II/112에 합류하여 유대인 관련 조직과 시온주의 운동들에 대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히브리어와 이디시어를 배우기까지 했고, 결국 나치당 내에서 유대인 문제와 시온주의에 대한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1938년부터는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 즉 홀로코스트 실행을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래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동유럽의 게토와 학살 수용소로 강제 추방하는 것을 촉진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살 정책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나치는 우선 이들을 강제 이주하려고 했으나, 해당 정책의 성과가 여의치 않자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를 만들어 사람들을 몰아넣는 강제 격리,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 말살시키는 집단 학살 정책을 차례대로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매사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그의 상관이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말이다. 1944년 3월에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도 아이히만은 그 지역의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시키는 것을 감독했다. 아이히만이 추방한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75%가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1941년 9월 중순에 아돌프 히틀러가 그에게 독일이 통제하는 영토의 모든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초기 계획은 소련을 모두 정복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동방총계획(점령된 동유럽과 소련 지역의 인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을 실행하는 것이었으나, 12월에 미군이 참전하고 독일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자, 결국 전쟁이 끝난 후가 아니라, 즉시 유럽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5월 독일 패망 후 전범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독일 전역에서 도망쳐 다녔다.
초기에는 독일의 산골 마을에 들어가 벌목공 행세를 하며 지냈고,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자 이탈리아를 거쳐 1950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후 1952년 자신의 가족들을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이고  1960년에는 집을 지어  이사가는 등 풍요롭게 생활했다. 하지만 결국 신분을 들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을 둘러싼 위협이 모두 사라졌다고 판단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온 나치 잔당들과 어울리다가 결국 꼬리를 밟힌 것이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었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유대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전체주의적 총통 체제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62년 6월 1일에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아이히만이 증오도 죄의식도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성격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지몬 비젠탈은 1988년 출판한 책 《Justice, Not Vengeance》에서 "세계는 이제 "책상 살인자"의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수백만 명을 죽이기 위해, 광신적이고, 가학적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무를 완수하려는 충성스러운 추종자면 충분하다."라고 썼다. "작은 아이히만"이라는 개념은 조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관료들을 경멸하는 개념이 되었다.

베티나 스탱네스(Bettina Stangneth)는 2011년 자신의 책 《Eichmann Before Jerusalem》에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윌리엄 사센과 인터뷰한 내용을 근거하여, 아이히만이 이데올리기적으로 동기 부여된 반유대주의자이자, 평생 나치에 헌신한 당원이었으며, 재판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관료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 야콥 로조윅(Yaacov Lozowick)과 데이비드 새자라니(David Cesarani) 등의 저명한 역사가들도 스탱네스의 주장에 동의했고, 이는 한나 아렌트가 믿었던 (아이히만이) 생각이 없는 관료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2024/07/08 16:03 2024/07/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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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독일어: Hannah Arendt, 표준어: 해나 아렌트, 1906년 10월 14일 ~ 1975년 12월 4일)


-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작가, 정치 이론가

-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다. 아렌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업적이“‘한 인간’이 아닌 ‘인류’가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공헌은 20세기와 21세기 정치 이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 1906년 10월 14일 독일 하노버 근교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조숙하고 명석했던 그녀는 고등학교에서 교사에게 반항하다 퇴학당했지만, 가정교육과 베를린 대학교 청강을 거쳐 1924년 마부르크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하이데거에게 수학하지만 현상학의 창시자인 후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실존철학자 야스퍼스의 지도 아래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1929)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뒤 본격적으로 유대인으로써 고난이 시작되었다.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일주일 동안 감금되었다가 가까스로 풀려났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반나치 운동에 참여하던 중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함락되자 이곳에 나치 독일의 괴뢰 정부가 들어서는 바람에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했다. 그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해,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뉴욕에 정착한 후 생을 마칠 때까지 미국시민으로 살았다.


- 아렌트와 가장 밀접하게 동일시되는 사상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토크빌에 이르는 고전적 시민공화주의(Classical republicanism)이다. 그의 정치 개념은 시민 참여와 집단 숙의를 강조하는 적극적인 시민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다.


- '전체주의의 기원'(1951)을 발표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며, '인간의 조건'(1958)으로 정치철학자의 입지를 굳혔다.

그 후로도 '과거와 미래 사이'(1961), '혁명론'(1963) 등 많은 글을 발표했으며,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담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유, 의지, 판단을 다룬 '정신의 삶'중 '판단' 원고를 집필하던 1975년 12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사유하기를 멈추면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 = 악의 평범성


- 《뉴요커》에 낸 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보고서(나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으로 발전하게 된다)에서

악이 근본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진부함(banality;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이나 비(非)활동이 낳을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다수 의견에 따르려 하는 경향)의 작용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 생각없음(thoughtlessness)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철저히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들과 그들의 수동적이고 마치 죽어 있는 듯하며 ‘생각없이’ 모든 것을 안이하게 수용하는 생활에 던져진 강렬한 메시지로 작용하였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3


- 1960년,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모사드가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 겸 홀로코스트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하여 예루살렘으로 압송하였다. 그 후 아이히만은 기소되어 1961년 4월 11일 공개재판이 열렸다.


-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듣게 된 직후 재판의 직접 참관을 원했던 그는  <더 뉴요커>의 특별 취재원으로 예루살렘으로 떠나게 된다. 취재 결과는 ‘전반적인 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목으로 총 다섯 차례에 걸쳐 기고되었으며, 이후 후기와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더해져 도서로 발간되기에 이른다.


- 이 책에서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홀로코스트 대학살을 주관했던 만큼 매우 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일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주 친절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공개재판에서 아이히만은 그동안 저질렀던 악행들에 대해, 본인은 그저 자신의 상관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지시한 사항들을 성실히 이행했을 뿐이라고 일관했다. 아이히만과 같은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그토록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해 생각하던 중, 한나 아렌트가 떠올린 개념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과 같은 선한 사람들이 스스로 악한 의도를 품지 않더라도, 당연하고 평범하다고 여기며 행하는 일들 중 무엇인가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자신의 기계적으로 행하는 일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지 않는 것은 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 우리 주변에 악은 언제나 생겨날 수 있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고문을 경험한 자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편하지 않다”라고 말한 아우슈비츠 생존자 장 아메리는 자신의 1966년작 《죄와 속죄의 저편》 을 통해 아렌트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인류의 적에 대해 들어서만 알 뿐이고 오로지 유리로 된 새장을 통해서만 그를 보았을 뿐이다.”


- 이 책이 담고 있는 사례, 즉 ‘아이히만’의 본모습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가장 최근에 논쟁이 일어난 시점은 2014년이다. 논쟁에 불을 지핀 건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탄네트의 저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이었다. 슈탄네트는 나치 패전 뒤 10년간 신분을 속이며 아르헨티나에서 살았던 아이히만이 쓴 메모와 글 수만 건을 분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내린다. 아이히만은 철저히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로 자신이 하는 행동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으며, 아이히만이 재판 당시 아둔한 하급 공무원처럼 굴었던 것은 형을 낮추기 위한 법정 전략에 불과했다고 말이다. 심지어 슈탄네트는 아렌트가 법정 전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아이히만에 대해 잘못된 해석을 낳았다는 다소 모욕 섞인 설명까지 덧붙여가며 자신의 입장을 서술했다.


- 지몬 비젠탈은 1988년 출판한 책 《Justice, Not Vengeance》에서 "세계는 이제 "책상 살인자"의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수백만 명을 죽이기 위해, 광신적이고, 가학적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무를 완수하려는 충성스러운 추종자면 충분하다."라고 썼다. "작은 아이히만"이라는 개념은 조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관료들을 경멸하는 개념이 되었다.


- 베티나 스탱네스(Bettina Stangneth)는 2011년 자신의 책 《Eichmann Before Jerusalem》에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윌리엄 사센과 인터뷰한 내용을 근거하여, 아이히만이 이데올리기적으로 동기 부여된 반유대주의자이자, 평생 나치에 헌신한 당원이었으며, 재판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관료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 야콥 로조윅(Yaacov Lozowick)과 데이비드 새자라니(David Cesarani) 등의 저명한 역사가들도 스탱네스의 주장에 동의했고, 이는 한나 아렌트가 믿었던 (아이히만이) 생각이 없는 관료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2024/07/07 09:46 2024/07/0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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