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말하다보니. 결혼생활이 좋지 않았다던. 소크라테스의 명언이 떠오른다.
'결혼은 해도 후회 하지 않아도 후회' . 그래서 차라리 해서 후회하련다고 결혼하는 사람들도 풍문으로 들었다.
모든건. 선택의 문제이다.
이 길을 선택해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 길을 선택해서 감내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채널
사진 속에서만큼은, 그녀도 나도 한없이 행복해 보인다. 약간의 부끄러움, 수줍음, 순간순간을 행복에 겨워하는 눈빛이 그 속에는 보관되어 있다.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사진 속의 삶은 그녀가 가보고 싶어했던 또 하나의 길이라기 보다는, 그녀와 내가 갔어야 했던 길임을. 그러나, 우리에겐 그 길을 갈 용기가 없었다.
가야 했는데 가지 못한 비겁함, 가고 싶었던 길을 가지 않은 죄책감, 이 행복에 겨워 보이는 사진들 뒤에 정말 가려져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쓸쓸함, 그런 뉘우침이 아닐까? 그것이 그녀가 굳이 자신과 나의 모습을 현실적으로는 백해무익하기만 한 사진이라는 형식으로 남겨두려 한 이유가 아닐까?
아니, 그녀와 나의 사진 찍기 놀이는 단순한 쓸쓸함이나 뉘우침 이상의, 현실을 견디고 싶어하는, 안간힘으로서의 <드라마 요법>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정신병 환자를 치료하는 가장 고전적 기술 중에 하나인 <사이코 드라마>에서, 환자는 상처받기 이전의 자기로 돌아가서 일인이역의 연기를 맡는다. 상처받은 나와 상처받지 않은 나. 환상에 빠져 있는 나와 현실을 직시하는 나. 꿈을 꾸고 있는 나와 실재를 바라보고 있는 나…… 그리하여 엉켜 있던 원시적 감각들을 분별하는 능력이 생겨난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환상과 실재를 구분하고, 이상과 현실을 구분한다. 꿈과 현실을 혼돈하던 원시인은, 그것이 다만 꿈에서 일어난 일이었음을, 욕망과 죄악을 혼동하던 중세인은 그것이 다만 성적 호르몬의 자연스러운 해소였음을, 텔레비전과 현실을 혼동하던 현대인은 그것이 다만 극중 이야기였음을 이해하고 분별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고 나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뒤집어본다. 지나치게 소박한 추론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환상과 실제를 혼동하기는커녕, 꿈과 현실을 구분짓지 못하기는커녕, 하나의 현실 속에 다차원적인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치 텔레비전의 채널처럼, 다양한 삶의 양식이 서로 어긋나는 삶의 공식들이 하나의 세계에 공존하고 있으며,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다만 채널을 돌려버리면 그만이라는 것을 너무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집이 소란하고 시끄러울 때는 카페에서 친구들을 만나거나 쇼핑을 하면 된다. 친구들이 시덥잖을 때는 애인을, 애인이 시시할 때는, 그 애인과 따따부따하기보다는 채널 돌리듯 새애인으로 바꿔버리면 되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일세대라고 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들은, 극중인물과 실제인물을 곧잘 혼동했지만, 그래서 텔레비전과의 거리를 상실해 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러나 우리 세대는 다르다. 우리 세대는 각자의 내면이 아예 텔레비전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세계를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 대해 논평하지 않고, 텔레비전에 나온 것들에 대해서 논평한다. 그나마 귀찮으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끄듯이 신경을 끈다. 다시 세계가 궁금해지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듯 전화를 걸어보거나 각양각색의 공간들을 조금씩 기웃거려본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탤런트가 되어버렸다. 탤런트의 배역과 역할을 좌우하는 것은 탤런트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광고주와 시청자들의 반응과 방송국 소유주이듯, 우리들은 끝없이 광고로부터 욕구를 전달받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 조절당하고, 우리의 물질적 소유주인 직장 상사나 부모로부터 간섭을 받는 세대다.
내 안에, 언제부터인가, 텔레비전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혼과 직장 생활은 정해진 대본처럼 상투화되어 가고 있다.
벨이 울린다. 그녀일지 모른다. 수화기에 손을 올려 놓은 채 나는 망설인다. 벨은 끊겼다가 다시 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나는 상관없는데, 그러나 한 가지만 선택해서 행동해야 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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