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2014/07/20 14:38

via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팔레스타인 분쟁 - 지도참조


[1]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BC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AD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2]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 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채택하였다.


[3]
문제의 발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양자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아랍측에는 맥마흔선언, 유대인측에는 밸푸어선언)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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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선언으로 인해 양측 모두 팔레스타인을 갖겠다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후 네 차례(1947ㆍ56ㆍ67ㆍ73년)의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였다.


[4]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5]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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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7]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고, 그에 비례하여 아랍국가들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증대됨에 따라 그 동안 소외되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정치적 위상도 커졌다. 마침내 1973년 11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되었다. 유엔 역시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단순한 테러집단이 아닌 정치적 실체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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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마침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 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 강 서안 헤브론(Hebron)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내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 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 강 서안에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중동 평화를 위한 여러 협정들이 체결된 결과 2003년 6월에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동평화로드맵'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9월 12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9]
한편,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아라파트의 죽음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효과적인 협상을 이룩하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아라파트 이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중도성향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는 평화 프로세스의 속개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2006년 1월 선거에서 압바스 정권을 부패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의 하마스(Hamas)가 다수당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4자 기구(Quartet)라고 불리는―미국과 러시아, UN과 EU는 향후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과거 합의사항의 준수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에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4자 기구(Quartet)가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진행된 선거결과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0]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하마스 간의 경쟁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정치적 이념적 헤게모니를 다투는 대안세력으로 발전해왔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참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지율 하락과 하마스의 성장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서의 간헐적 무력 충돌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쟁의 악순환을 형성한다.
팔레스타인 측이 압바스 정부와 하마스간의 불화와 권력투쟁으로 책임과 권위를 가진 대표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공식적인 평화 프로세스의 가동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더하는 요인이다.
2012년 2월 팔레스타인 온건파 파타와 무장정파 하마스가 단일 정부 구성의 실질적 절차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과도 단일 정부 총리로 추대하는데 합의한 것은 가자지구가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집권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조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파타와 하마스와의 합의가 평화 협상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아바스 수반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진척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더욱이 테러집단으로 지목하는 하마스와의 단일 정부 구성은 테러집단의 지원을 금지한 법안에 따라 미국의 지원과 협력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2014/07/20 14:38 2014/07/2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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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2014/07/13 17:12

같은 이슬람교이면서 왜 그렇게 싸우나요 (via 네이버 학생백과)


이슬람 선구자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자 구도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던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당시 무슬림의 존경을 받았던 아부 바크르가 첫 후계자(칼리프)로 선출된다. 3대 칼리프였던 우마미야 가문의 우스만은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하고 코란을 정비해 교리를 체계화 한다.

종파 간 견해 차이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아랍 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657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옴미아드가(家)의 수장 무아위야가 알리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반란을 일으켜 시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코란 구절을 창끝에 매달고 중재인을 내세워 협상을 하게 되고 알리와 무아위야는 동-서로 영역을 양분하는 협정을 맺는다. 알리의 협정이 나약한 결정이었다고 실망을 느낀 추종자들은 그를 떠났는데, 그 가운데 하와리지파는 후일 알리를 암살한다.

알리가 암살당하자 무아위야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알리의 장남을 격파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이 때 무아위야는 본래 선출 임명직이었던 칼리프의 지위를 세습화로 고정시켰다.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었는데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알 리가 야지드의 승계를 부정하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파로 돌아가 봉기 계획을 세운다. 이에 680년 쿠파의 총독이었던 우베이둘라는 그들의 봉기를 인정하지 않고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알리를 공격하여 그 일가를 괴멸시켰다.

마호메트의 외가 혈통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시아파는 정식으로 수니파로부터 분파했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이다.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을 순니라 하고 이들을 수니파라고 한다.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로 보고 코란을 최종적 계시로 삼으며 전 세계 무슬림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보고 그를 지지하며 만들어진 종파이다. 4명의 칼리프가 아니라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잇는 후계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4대 칼리프 이후 우마미야 가문이 선출이 아닌 세습 체제로 이어가자 시아파는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정통 후계자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 칼리프 지위를 돌려주자고 주장하며 수니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수니'란 말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순나(말과 행동,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시아트알리)'을 말한다.

수니파는 정통파라고 자신들을 칭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형식을 채택했으니, 외국인 칼리프까지 허용했다. 또한 새롭게 이슬람교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관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시아파는 초기에 이슬람교도의 공동체적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파벌로 시작해 훗날 종교적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세속적으로(다른 말로는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데 반발하는 독실한 신자들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던 비아랍계 이슬람교도, 즉 마왈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고, 시아파는 이란,이라크를 포함한 걸프 지역 및 시리아,레바논에 소수가 거주하고 있다. 아랍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수니파와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시아파는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민족간 갈등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2014/07/13 17:12 2014/07/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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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War of the Arrows 2011 KR

2011/09/25 10:52

액션, 전쟁 / 한국 / 122분 /  개봉 2011.08.10
감독: 김한민  / 배우: 박해일(남이), 류승룡(쥬신타), 김무열(서군), 문채원(자인)
20110924 CGV불광

촬영과 편집이 굉장히 멋진 작품.
스토리텔링은 별로 없으나 속도감 있는 진행으로 긴장감을 유지시켜서 좋았다.
마지막 호랑이 CG는 실망.

*
우리나라는 치욕의 역사가 참으로 많다.
치욕적인 패배는 일제강점기 전에도 있었다.
북방정책을 펼치던 광해군을 밀어내고 왕권을 잡은 인조의 세력들은 지네들끼리만 잘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결국 외세의 침략을 받았다. 바로 이때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
역사를 그리고자 했던 것은 아니지만 실망스런 과거의 역사를 또 떠올리게 만들었다.
인조의 아들은 모두 인질로 청으로 넘겨졌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역사공부를 멀리한지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두 이성계 장군의 후손들이면 무관들에게 소홀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았나. 정조이후로는 학자도 별로 배출하지 못했으면서 허세만 부리는 먹물쟁이들때문에 나라가 그 꼴이 되었다. 성품이 곧은 인물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그 누가 강직한 인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후손인들 그렇게 살아갈까.



2011/09/25 10:52 2011/09/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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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on 2004.01.19
태극기 휘날리며 TaeGukGi: Brotherhood Of War 2004 KR
전쟁, 드라마, 액션, 분단  / 한국 / 145분  / 2004 .02.05 개봉
감독 : 강제규 / 출연배우 : 장동건 원빈 공형진 이은주
2004.02.03 역삼동 메가박스

씨발 일제때는 나라 찾는다고 싸우기라도 했지. 지금은 대체 뭐야! 뭐냐구!


전쟁의 공포로 참호에 있던 한 병사가 이리저리 총구를 날리다 결국은 자살을 하자 그를 보고있던 다른 병사가 외치는 이 한마디.
바로 그것이, 625 전쟁이었다. 사상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알지도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이 그냥 남쪽에 살고 북쪽에 산다는 이유로 참여한 전쟁.
그 전쟁의 휘둘림속에 실제 있었을 이야기.

전쟁이 터지자 피난을 떠나기 바쁘던 사람들. 국군의 소집령에 얼떨결에 앞으로 떠밀려서 참여하게 된 18-30살의 남자들.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보내야만 했던 여인들. 병약하고 어린 동생이라도 살리려 자신을 사지로 내모는 형. 형의 그러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같이 죽겠다는 동생...

형. 난 이게 꿈인것같아. 내일 아침에 꿈에서 깨면, 난 형에게 이런꿈을 꾸었노라고 이야기 하겠지. 옆에서 영자누나는 아침을 하느라 분주할거고. 그래 이건 꿈일꺼야.

가슴아프게 내뱉는 동생. 그런 동생이 안쓰러운 형...

계속된 전쟁속에서 동생을 제대시키는 것만이 삶의 목표인 형은 갈 수록 잔악무도해지고, 그런 형을 지켜보는 동생은 형의 진심을 알길없이 갈 수록 형에 대한 증오가 깊어진다.

동생이 갖고 싶어했던 만년필을 겉옷주머니에 간직한채 동생의 후퇴를 돕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내던지는 형의 가족애.

형. 돌아와서 전해준다고 했잖아. 금방 온다고 해놓고. 50년이나 기다리게 해놓고. 이제서야 이런 모습으로 ...

한국전쟁의 참상.
그것은 민주주의의 쟁취도 타도괴도도 아닌, 골육상잔의 비극인 것이다.

주연, 조연배우들의 연기는 약간의 CG의 미숙함을 커버해주고도 남는다. 다만 두 주연배우를 지나치게 부각시키어 전쟁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해주지 않음이 아쉽다.

솔직히 이 시점에서 북에 관련된 영화가 두편이 개봉이 된 것에 대한 의문점은 갖고 있다.

김추기경이 언급했듯이, 젊은이들이 미국을 멀리하고 북한을 가깝게 여김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이 볼때 이 영화는 이런 감정을 줄 것 같다.
' 그래 우리가 이래서 미국에게 고마워해야 하는거야. 그때 미국이 없었어봐. 우린 이미 공산당에게 먹혔어'
' 아니 우리가 언제적부터 북한을 불쌍히 여겨왔다고 요즘 이 난리들인거야.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야 ' 하며 다시한 번 그 시절을 떠올릴 어른들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

참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다. 당시의 전쟁은 이미 그 무엇도 아닌 -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 - 적을 무찌르는 것 뿐이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임을 당하는 분위기. 그리하여 앞에 보이는 적은 나를 죽이려드는 총든자이고 그렇기때문에 반듯이 죽여야 한다. 는 감정. 그런 극한의 대립이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내가 죽기때문에 저들을 죽게 만드는 그런 감정은 쉽게 오는 감정은 아니다. 절박함과 극박함. 왜 그러했을까.

일제강점기의 서러움을 벗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일어난 전쟁이었다. 또한 우리의 분단은 냉전시대의 부산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안타까운 형제끼리의 싸움. 50년이상의 분단의 세월...
현재까지도 전쟁당시의 감정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화두.
우리가 왜 전쟁을 했는가.
북한은 진정 우리의 주적인가.

2011/09/06 05:03 2011/09/06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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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망명설…정권 붕괴 초읽기

2011/08/24 10:37

리비아에서 42년간 철권 통치를 지속해온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붕괴의 순간에 직면했다.
미국 NBC방송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사진)가 튀니지로 망명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19일 보도했다.

카다피의 망명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이유는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제외한 리비아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면서 카다피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링크를 통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기사계속)




2011/08/24 10:37 2011/08/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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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태 종합

2011/08/24 09:05

티베트 사태 종합   2008/03/17 18:02

0. 경과: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인 중국 시짱자치구 즉 티벳의 자치구 수도인 라싸시내는 완전 인적이 끊긴 상태.

인도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최근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발생한 시위사태와 관련해 확인된 사망자가 30명이며 최대 1백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15일 밝혔다. 망명정부는 또 라싸 지역은 사실상 계엄 상태이며 티베트 사원들은 무장 군인들에게 완전히 봉쇄됐고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신도 제한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티베트를 빠져나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장한 군인과 탱크가 라싸 시내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고 상점은 문을 닫고 시민들은 외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티베트 독립요구 시위는 간쑤성과 칭하이 성까지 확대되고 있다. 간쑤성에 있는 장족자치주에서는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를 해산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정부는17일 자정까지 불법시위자들이 자수하지 않을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며 시위자를 숨겨주거나 도피를 도와주는 사람까지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0. 지구촌 곳곳에서 무력진압 항의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요구 시위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 스위스, 인도 뉴델리, 호주 시드니 등 지구촌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다.

* 추가 기사 링크




2011/08/24 09:05 2011/08/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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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2011/08/23 23:17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2005/09/30 17:01

대체 왜 이들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싶어서 저들의 태생과 반목의 이유를 기록했었다.
꽤 여러 자료를 찾아 나름 만족스런 결과물로 내놨었는데..
다시 정리해서 포스팅 해보련다 .

O 유태교(유대교) * 위키백과
고대 이스라엘(또는 헤브라이)인의 자손인 유태인에게 전승ㆍ신봉되어 온 종교.
바빌론의 포로에서 해방된 근거를 신과의 계약의 실현에서 찾았던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하고, 율법(Torah)과 의례를 골간으로 하는 유태교(이때부터 이스라엘인은 유태인으로 불리우게 된다.)를 B.C. 4~5세기 경에 성립시켰다.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어 로마의 백성이 된 유태인에게 종말사상과 메시아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도 유태교의 메시아로 출현하게 된다. 유대교는 아직도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교의 텍스트, 전통과 가치들은 기독교, 이슬람과 바하이교를 포함하는 후기 아브라함의 종교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 말하는 구약성경이 주요 성전이다.

O 기독교 * 위키백과
천지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하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 1C 경 설립.
하나님(聖父)은 그리스도(聖子)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고, 성령(聖靈)은 교회 안에 머물러 인간을 거룩하게 한다. 이들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나님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태로 하는 종교이다.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생각되는 인물 정도로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세주, 곧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이 것이 결정적인 이 두 종교의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인간은 예수가 세운 교회를 통하여 삼위일체인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성부에게는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성자에게는 인간을 구원하였음을, 성령에게는 인간을 거룩하게 함을 감사드려야 한다. 예수가 교회를 세웠으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하는데, 사제는 거룩한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사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은 제각기 성체봉헌에 참여하여 성사(聖事)를 받음으로써 온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를 바친다.)는 보통 천주교로, 프로테스탄티즘(성서의 하나님 말씀을 교회 전통이나 회의의 권위 위에 두어, 누구나 이를 읽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자유를 부여하였다)은 개신교 또는 기독교로 불리고 있다.
흔히 말하는 신약성경이 주요 성전이다.


O 이슬람교 * 위키백과
유일신 알라(하나님)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기독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다. 7C 경 설립.
처음부터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oslem)이라는 용어는 ‘절대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기본신앙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그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또, 코란은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슬렘일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아담 이후의 노아·아브라함·모세·이삭·예수·마호메트는 모두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도로서 여겨진다. 따라서 모슬렘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기독교에서와 같은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에서의 원죄설도 부인한다. 마호메트는 최후심판의 날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최후의 사도로서 종래의 모든 예언자의 활동을 보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후대에 많은 종파로 분열하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순니 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 파로 대별된다. 순니파는 전체 무슬림 인구의 80-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시아파와 순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지도자 · 인도자"를 뜻하는 "이맘"에 대한 견해이다. 순니파에서 이맘은 코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코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 종교 지도자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이슬람교는 메시아가 알라이다.

O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
유럽 등지에서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을 때, 유대인은 기독교인으로부터 강제 추방, 학살 등의 박해를 받았다. 이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 보는 편견 때문이었다.

O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그 1차적 원인은 신학적 이견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설을 코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에게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 3위가 계시다”는 교리는 어떠한 단서나 설명을 붙여도 하느님의 유일성에 위배되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수태, 치유의 능력 등 갖가지 이적(異蹟)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무함마드와 같은 “하느님의 예언자”일 뿐이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도 교인들은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役事)를 오해 내지 곡해했다. 그리고 잘못된 교리를 믿는 것은 하느님의 예언자를 신격화하고 교회의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절대화하는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다.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할 수 없었던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그랬듯이 그리스도교는 이슬람의 출현으로 빛을 잃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 주역은 이슬람에게 주어졌다는 이슬람의 교리가 그것이다.
초기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 땅에 이슬람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엇다. 그러나 당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기독교는 우호적으로 다가온 무하마드를 적대시했다. 그것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는 앙숙관계가 되었고 그 불씨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자기의 영역을 지키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났고 십자군전쟁과 같은 수많은 성전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중세유럽이 교회와 전사집단은 체재를 살리고 기득권을 보호하기위해 이슬람과 충돌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무지와 편견을 조장, 서유럽세계에서 존중받던 이슬람세계는 갑자기 사악한 악마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덩달아 유럽에 살던 유대인도 크게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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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전쟁, 분단 / 한국 / 133분 / 2005 .08.04 개봉

감독 : 박광현 / 출연배우 :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압구정CGV

강혜정의 역할이 참으로 예뻤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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