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2014/07/20 14:38

via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팔레스타인 분쟁 - 지도참조


[1]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BC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AD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2]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 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채택하였다.


[3]
문제의 발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양자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아랍측에는 맥마흔선언, 유대인측에는 밸푸어선언)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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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선언으로 인해 양측 모두 팔레스타인을 갖겠다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후 네 차례(1947ㆍ56ㆍ67ㆍ73년)의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였다.


[4]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5]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6]
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7]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고, 그에 비례하여 아랍국가들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증대됨에 따라 그 동안 소외되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정치적 위상도 커졌다. 마침내 1973년 11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되었다. 유엔 역시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단순한 테러집단이 아닌 정치적 실체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8]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마침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 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 강 서안 헤브론(Hebron)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내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 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 강 서안에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중동 평화를 위한 여러 협정들이 체결된 결과 2003년 6월에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동평화로드맵'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9월 12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9]
한편,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아라파트의 죽음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효과적인 협상을 이룩하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아라파트 이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중도성향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는 평화 프로세스의 속개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2006년 1월 선거에서 압바스 정권을 부패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의 하마스(Hamas)가 다수당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4자 기구(Quartet)라고 불리는―미국과 러시아, UN과 EU는 향후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과거 합의사항의 준수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에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4자 기구(Quartet)가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진행된 선거결과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0]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하마스 간의 경쟁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정치적 이념적 헤게모니를 다투는 대안세력으로 발전해왔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참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지율 하락과 하마스의 성장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서의 간헐적 무력 충돌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쟁의 악순환을 형성한다.
팔레스타인 측이 압바스 정부와 하마스간의 불화와 권력투쟁으로 책임과 권위를 가진 대표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공식적인 평화 프로세스의 가동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더하는 요인이다.
2012년 2월 팔레스타인 온건파 파타와 무장정파 하마스가 단일 정부 구성의 실질적 절차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과도 단일 정부 총리로 추대하는데 합의한 것은 가자지구가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집권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조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파타와 하마스와의 합의가 평화 협상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아바스 수반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진척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더욱이 테러집단으로 지목하는 하마스와의 단일 정부 구성은 테러집단의 지원을 금지한 법안에 따라 미국의 지원과 협력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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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2014/07/13 17:12

같은 이슬람교이면서 왜 그렇게 싸우나요 (via 네이버 학생백과)


이슬람 선구자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자 구도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던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당시 무슬림의 존경을 받았던 아부 바크르가 첫 후계자(칼리프)로 선출된다. 3대 칼리프였던 우마미야 가문의 우스만은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하고 코란을 정비해 교리를 체계화 한다.

종파 간 견해 차이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아랍 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657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옴미아드가(家)의 수장 무아위야가 알리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반란을 일으켜 시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코란 구절을 창끝에 매달고 중재인을 내세워 협상을 하게 되고 알리와 무아위야는 동-서로 영역을 양분하는 협정을 맺는다. 알리의 협정이 나약한 결정이었다고 실망을 느낀 추종자들은 그를 떠났는데, 그 가운데 하와리지파는 후일 알리를 암살한다.

알리가 암살당하자 무아위야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알리의 장남을 격파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이 때 무아위야는 본래 선출 임명직이었던 칼리프의 지위를 세습화로 고정시켰다.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었는데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알 리가 야지드의 승계를 부정하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파로 돌아가 봉기 계획을 세운다. 이에 680년 쿠파의 총독이었던 우베이둘라는 그들의 봉기를 인정하지 않고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알리를 공격하여 그 일가를 괴멸시켰다.

마호메트의 외가 혈통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시아파는 정식으로 수니파로부터 분파했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이다.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을 순니라 하고 이들을 수니파라고 한다.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로 보고 코란을 최종적 계시로 삼으며 전 세계 무슬림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보고 그를 지지하며 만들어진 종파이다. 4명의 칼리프가 아니라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잇는 후계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4대 칼리프 이후 우마미야 가문이 선출이 아닌 세습 체제로 이어가자 시아파는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정통 후계자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 칼리프 지위를 돌려주자고 주장하며 수니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수니'란 말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순나(말과 행동,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시아트알리)'을 말한다.

수니파는 정통파라고 자신들을 칭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형식을 채택했으니, 외국인 칼리프까지 허용했다. 또한 새롭게 이슬람교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관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시아파는 초기에 이슬람교도의 공동체적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파벌로 시작해 훗날 종교적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세속적으로(다른 말로는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데 반발하는 독실한 신자들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던 비아랍계 이슬람교도, 즉 마왈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고, 시아파는 이란,이라크를 포함한 걸프 지역 및 시리아,레바논에 소수가 거주하고 있다. 아랍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수니파와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시아파는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민족간 갈등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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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ot Acts

2011/09/03 19:59

Boston legal 4x20. Patriot Acts   2008/09/27 11:51

이 드라마에서 앨런 쇼어는 쉽게 이길 수 없는 소송을 맡아 변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소송에서 나오는 변론은 대부분 Dave E. Kelly (작가) 의 입장이고 의견이며 앨런과 대니의 대화를 통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극명한 입장차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대체적으로 공감이 가고 미국에서 벌이고 있는 정치사안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이번 방송에서 보여주는 소송은 미국 애국자법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여준다.

메사추세츠주의 한 동네에서 미연합 즉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에서 분리되고 싶다, 독립하고 싶다고 소송을 벌인다. (현실에서도 미국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집단이 있다)

우린 분리되고 싶네 연방으로부터 말일세
We wish to secede. From the union.
우린 독립을 원해
We want independence.

콩코드 사람들은 이 나라가 가는 방향을 좋아하지 않아
The people of Concord do not like the direction of this country.
압제 정책에 특히 그렇지 국내외에서 말이야
In particular, its oppressive policies, both abroad and here at home.

토마스 제퍼슨은(미국 분리선언문을 기초한 사람)
It was Thomas Jefferson who said,
"어떤 형태의 정부건 그것이 파괴적으로 변하면, 그것을 개조하거나 폐지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다"라고 말했지
"whenever any form of government become destructive, it is the right of the people to alter or to abolish it and to establish new government."
그게 우리가 원하는 바야
That is what we wish to do.

주에서 분리되고자 하는 동네의 모든 주민은 "애국자법 Patriot Acts" 에 따라서 그 개인의 모든 정보가 파헤쳐진다. 소송은 이 애국자법의 폐혜를 따지기 위해서 벌이게 된 것. 즉결심판에서 판사가 소송으로 가도 되겠다(배심원들과 취재진이 지켜보는)고 판결만 하면 정치적 주장을 펼쳐 여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애국자법에 따라 현재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지역 방문을 할 때 시위할 권리도 없다. 자유발언지대라는 곳에 따로 있어 그곳에서만 시위를 할 수 있다. 뉴스에서는 이라크에서 군인의 관이 돌아와도 방송에 내보내지 못한다. 이건 냉전시대 구소련에서나 어울릴 법한 검열이지 미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고 주장하는 소송인. 그들은 미국에서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다수결의 원칙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시중 제네바 협정(고문금지)을 지키지 않는 미국을 비판한다. 제대로 된 심리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관타나모같은 포로수용소에 가두는 현실. (반대편인 대니는 이에 대한 반론으로 1.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5천여명의 미국인을 체포했었으며 2.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부분이 무고한 아이들이었던 10만여명의 일본계 미국인을 가두었었다. 3. 린든 베인스 존슨 대통령은 FBI를 이용해 기자들을 감시했다. 4. 빌 클링턴 대통령은 직접 고문을 하지는 않았으나 다른 고문이 허용된 국가들로 이송시켰다. 는 내용을 제기하며 지금 미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비판받는 것들 중에서 예전부터 해오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사실상 모든 민주당원들은 부시의 최악의 정책들을 지지했다. 애국자법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 단 한명의 민주당 상원 의원이 반대했을 뿐이다.


내 세대의 사람들에게 미국민이라는 건 개인적 문제라는 거야
for people of my generation, being an American... is personal.
자네는 자라오면서 미국이 언제나 건재할 거라고 당연히 믿어 왔지
In your life, growing up, you just took for granted that America would always be.
왜 아니겠어? 초강대국이고 세계에서 최강국이니까
Why not? It's a superpower, strongest country in the world.

히틀러가 세계를 제압하려 하고 그럴 수단이 있었던 내 시대엔
미국이 쓰러질까 두려워하면서 잠자리에 들었어
In my lifetime, with Hitler trying to take over the world and having the means to do so, we went to bed scared at night that America would end.
그 느낌을 상상해 봐, 앨런
Imagine that feeling, Alan.

자유발언을 범죄 취급하고 영장없는 수색을 허가하고 타당한 이유없이 도청을 허용하는 애국자법. 말하거나 생각한 걸 기준으로 사상규제법으로 미국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부당할 수 있다. (애국자법은 9/11 테러로 미국인들이 패닉상태일 때 6주만에 만들어진 것으로 서둘러 밀어부쳐 토의도 거의 없었던 법률이다. 법률 자체를 제대로 읽어본 의원도 별로 없다고 하기도.)
의심만으로도 사람을 가둘 수 있고 적법한 절차나 심리도 허용하지 않으며 심지어 고문을 자행하기 위한 장소는 이집트의 지하 감옥 건설에 사용된 기술로 지어졌다.
앨런은 법과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의 행위가 아니다고 강력하게 규탄한다. 그러면서 말한다.
미국에서 잃을까봐 가장 두려워하는게 무엇인지, 또 이미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를.


*
물론 앨런 쇼어가 법정에서 벌이는 일련의 쇼는 실제 미국에서 벌어지는 것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들은 방송을 타고 미국인들에게 반성의 시간을 준다. 이런 드라마가 방송이 된다는게 이런 드라마작가가 있다는게 참 부럽다.


*
Memorable Quotes
You are absolutely no match for him. 당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공화당의 분신인 대니가 이 소송의 반대 변호사로 나오자 법률회사의 대표변호사가 앨런을 이길 수 없다며 그를 만류한다. )

Friendships are a little like backyard gardens.
We plan to tend to them... We just always seem to put it off till next week.
우정이란 뒤뜰의 정원 같은 거예요.
돌봐야겠다 마음먹지만.. 항상 다음 주로 미루게 되죠.



2011/09/03 19:59 2011/09/0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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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2011/08/24 10:38

리비아의 정치인으로,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현재까지 리비아의 국가 원수로 있다. 가다피라고도 부른다.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로 불리는 한편, 사막의 미친 개라는 불명예스런 별명도 있다.

1977년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체 구축을 명분으로 의회제도와 헌법을 폐지, 전제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철저히 반미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등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1인 독재를 추구한 카다피는 알 카에다 등 이슬람 근본주의자들도 강력하게 탄압했으며 이에 맞서 알 카에다는 수차례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다.

* 위키백과 발췌

2011/08/24 10:38 2011/08/2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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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망명설…정권 붕괴 초읽기

2011/08/24 10:37

리비아에서 42년간 철권 통치를 지속해온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이 붕괴의 순간에 직면했다.
미국 NBC방송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사진)가 튀니지로 망명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19일 보도했다.

카다피의 망명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는 이유는 반군이 수도 트리폴리를 제외한 리비아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하면서 카다피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래 링크를 통해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기사계속)




2011/08/24 10:37 2011/08/2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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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사태 종합

2011/08/24 09:05

티베트 사태 종합   2008/03/17 18:02

0. 경과: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지역인 중국 시짱자치구 즉 티벳의 자치구 수도인 라싸시내는 완전 인적이 끊긴 상태.

인도의 티베트 망명정부는 최근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발생한 시위사태와 관련해 확인된 사망자가 30명이며 최대 1백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15일 밝혔다. 망명정부는 또 라싸 지역은 사실상 계엄 상태이며 티베트 사원들은 무장 군인들에게 완전히 봉쇄됐고 외부 세계와 연결되는 통신도 제한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티베트를 빠져나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무장한 군인과 탱크가 라싸 시내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고 상점은 문을 닫고 시민들은 외출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티베트 독립요구 시위는 간쑤성과 칭하이 성까지 확대되고 있다. 간쑤성에 있는 장족자치주에서는 티베트 불교 승려 수백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시위를 해산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정부는17일 자정까지 불법시위자들이 자수하지 않을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며 시위자를 숨겨주거나 도피를 도와주는 사람까지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0. 지구촌 곳곳에서 무력진압 항의
티베트 수도 라싸에서 시작된 티베트 독립 요구 시위는 미국 뉴욕 유엔본부, 스위스, 인도 뉴델리, 호주 시드니 등 지구촌 곳곳으로 확대되고 있다.

* 추가 기사 링크




2011/08/24 09:05 2011/08/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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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2011/08/23 23:17

유태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2005/09/30 17:01

대체 왜 이들은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일까 싶어서 저들의 태생과 반목의 이유를 기록했었다.
꽤 여러 자료를 찾아 나름 만족스런 결과물로 내놨었는데..
다시 정리해서 포스팅 해보련다 .

O 유태교(유대교) * 위키백과
고대 이스라엘(또는 헤브라이)인의 자손인 유태인에게 전승ㆍ신봉되어 온 종교.
바빌론의 포로에서 해방된 근거를 신과의 계약의 실현에서 찾았던 이스라엘인은 예루살렘에 신전을 재건하고, 율법(Torah)과 의례를 골간으로 하는 유태교(이때부터 이스라엘인은 유태인으로 불리우게 된다.)를 B.C. 4~5세기 경에 성립시켰다. 로마에 의해 완전히 정복되어 로마의 백성이 된 유태인에게 종말사상과 메시아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도 유태교의 메시아로 출현하게 된다. 유대교는 아직도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유대교의 텍스트, 전통과 가치들은 기독교, 이슬람과 바하이교를 포함하는 후기 아브라함의 종교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흔히 말하는 구약성경이 주요 성전이다.

O 기독교 * 위키백과
천지만물을 창조한 유일신을 하나님으로 하고,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종교. 1C 경 설립.
하나님(聖父)은 그리스도(聖子)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을 구원하고, 성령(聖靈)은 교회 안에 머물러 인간을 거룩하게 한다. 이들은 각기 독립적인 위격(位格)이면서도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3위로써 하나의 하나님을 이룬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가장 특징적인 신관(神觀)인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리이다.
기독교는 유대교를 모태로 하는 종교이다. 유대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생각되는 인물 정도로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준 메시아로 믿는다.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구약성경에 예언된 구세주, 곧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이스라엘의 하느님이라고 믿는다. 이 것이 결정적인 이 두 종교의 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마가톨릭교회(인간은 예수가 세운 교회를 통하여 삼위일체인 하나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하는데, 성부에게는 인간을 창조하고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성자에게는 인간을 구원하였음을, 성령에게는 인간을 거룩하게 함을 감사드려야 한다. 예수가 교회를 세웠으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제사에 참여하는데, 사제는 거룩한 권능을 받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사성제를 드리고, 신자들은 제각기 성체봉헌에 참여하여 성사(聖事)를 받음으로써 온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제사를 바친다.)는 보통 천주교로, 프로테스탄티즘(성서의 하나님 말씀을 교회 전통이나 회의의 권위 위에 두어, 누구나 이를 읽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자유를 부여하였다)은 개신교 또는 기독교로 불리고 있다.
흔히 말하는 신약성경이 주요 성전이다.


O 이슬람교 * 위키백과
유일신 알라(하나님)의 가르침이 대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마호메트에게 계시되었으며, 유대교 ·기독교 등 유대계의 여러 종교를 완성시킨 유일신 종교임을 자처한다. 알라의 계시를 모은 것을 '코란'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호메트가 말한 내용으로서, 그가 죽은 뒤 신도들이 수집 ·정리한 것이다. 7C 경 설립.
처음부터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oslem)이라는 용어는 ‘절대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슬람의 기본신앙은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마호메트는 그의 예언자”라는 신앙고백에서 출발한다. 또, 코란은 “다만 믿는 것으로 그치고, 이를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슬렘일 수 없다.”고 못박고 있다.
구약에서 말하는 아담 이후의 노아·아브라함·모세·이삭·예수·마호메트는 모두 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도로서 여겨진다. 따라서 모슬렘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사도로 존경하나, 기독교에서와 같은 예수신성, 십자가와 부활의 개념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 기독교에서의 원죄설도 부인한다. 마호메트는 최후심판의 날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임무를 띠고 이 땅에 온 최후의 사도로서 종래의 모든 예언자의 활동을 보완, 완성하기 위해서 왔다고 주장한다.
후대에 많은 종파로 분열하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대표하는 순니 파와 이란이 대표하는 시아 파로 대별된다. 순니파는 전체 무슬림 인구의 80-90%를 차지하며 시아파는 10-20%를 차지한다. 시아파와 순니파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지도자 · 인도자"를 뜻하는 "이맘"에 대한 견해이다. 순니파에서 이맘은 코란을 독경하고 예배를 인도하는 정도의 사람을 가리킨다(전통적으로 이슬람은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즉 "성직자"를 인정치 않으며 모든 신도가 직접 신앙의 힘으로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이맘은 알리와 후세인의 후계자, 코란의 신비를 밝혀주어 신도들을 빛과 은총으로 이끄는 사람으로 격상됐다. 이란의 호메이니와 그 뒤를 이은 최고 종교 지도자 하메네이 같은 이들이 가장 최고위급의 이맘들이다.
이슬람교는 메시아가 알라이다.

O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
유럽 등지에서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을 때, 유대인은 기독교인으로부터 강제 추방, 학살 등의 박해를 받았다. 이는 유대인이 예수를 죽인 민족으로 보는 편견 때문이었다.

O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
그 1차적 원인은 신학적 이견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설을 코란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에게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 3위가 계시다”는 교리는 어떠한 단서나 설명을 붙여도 하느님의 유일성에 위배되는 가르침이다. 그들은 또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교리를 부정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동정녀 수태, 치유의 능력 등 갖가지 이적(異蹟)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그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무함마드와 같은 “하느님의 예언자”일 뿐이다.
이슬람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그리스도 교인들은 예수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과 역사(役事)를 오해 내지 곡해했다. 그리고 잘못된 교리를 믿는 것은 하느님의 예언자를 신격화하고 교회의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견해를 절대화하는 일종의 우상숭배 행위다. 그리스도교가 이슬람을 인정할 수 없었던 보다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그랬듯이 그리스도교는 이슬람의 출현으로 빛을 잃게 되었으며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그 주역은 이슬람에게 주어졌다는 이슬람의 교리가 그것이다.
초기 이슬람은 기독교에 대해 적대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이 땅에 이슬람 공동체를 세우고자 했엇다. 그러나 당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기독교는 우호적으로 다가온 무하마드를 적대시했다. 그것으로 이슬람과 기독교는 앙숙관계가 되었고 그 불씨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종교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자기의 영역을 지키려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어났고 십자군전쟁과 같은 수많은 성전을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중세유럽이 교회와 전사집단은 체재를 살리고 기득권을 보호하기위해 이슬람과 충돌할 필요가 생기게 되어 무지와 편견을 조장, 서유럽세계에서 존중받던 이슬람세계는 갑자기 사악한 악마취급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에 덩달아 유럽에 살던 유대인도 크게 곤란을 겪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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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결과의 의미

2004/11/05 03:25

2004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 대통령이 케리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승리했다.
이번 선거가 현직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대한 유권자 심판의 성격이 강한 만큼 기존 대내외 정책의 기본 골격이 계속 유지될 전망이다. 부시 2기 정부는 향후 자유무역 기조 하에 FTA, 다자간 협상 등을 병행 추진하는 다면통상전략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시장의 수입 규제 강도는 크게 높아지지 않겠지만, 교역 상대국 시장에 대한 개방 압력을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11월 1일에 조사한 여론에서 유권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거 쟁점을 테러라고 꼽았다. 외교 정책에서는 부시 대통령, 경제 현안에서는 케리 후보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상황에서 부시를 선택하였으니, 미국 국민은 반테러와 안전을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 미 유권자들은 정권 교체에 따른 불확실성이 안보 및 테러 위협을 고조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당은 부시 정권을 고용이 늘지 않은 정부임을 중점 부각시켜 선거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려 하였으나 선거를 앞두고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고용이 증가하여 경제 이슈가 선거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 선거결과에 이렇게 주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케리라고 특별히 호감이 갔던 것은 아니지만, 테러에 위협당하는 상황을 만들어 낸 부시가 되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미국 국민은 부시라면 자기들 목숨 잃게 만들진 않을 것이라고 보았나보다.

바빌론이



2004/11/05 03:25 2004/11/05 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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