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 생전에는 온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으나, 사후에 철학은 물론 문학, 예술, 사회학, 심리학 등 수많은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영원한 세계'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 유대인들이 그들의 망상으로 도덕이나 종교, 문화, 역사 등을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했다고 했다. 이는 유대인 혐오의 근거가 되기도 했는데, 그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의 외면은 물론 내면도 포함해 모든 것을 사기날조로 전복하는 운명적 민족이자 노예 혹은 약자로 규정지었다.
-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멸망적 교리만을 전했다며 기독교를 비판했다.
- 1869년 학위도 없는 학생신분이었던 그는 - 당시 이름난 고전문헌학자였던 리츨 교수의 강력한 의지로 - 고작 24세의 나이로 교수가 되었다. 학위 논문 심사를 거치지도 않고 박사 학위를 받고, 스위스 바젤 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에 취임한 것이다. 바젤 대학교 문서에 따르면, 리츨 교수의 강한 추천과 그의 문헌학에 대한 특출난 재능 때문에 이러한 이례적인 결단이 내려졌다고 한다. 바젤 대학교는 그에게 프로이센 시민권을 포기하고 스위스 국적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래서 프로이센 시민권을 버렸지만, 스위스 시민권을 취득하는 데 필요한 요건을 채우지 못해 이후 무국적자로 살게 된다.
- 교수직을 시작하며 스위스 바젤에 정착하던 무렵, 오페라의 거장 바그너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그와 바그너가 나눈 수많은 철학적 대화들은, 그에게는 철학적 영감을, 바그너에게는 음악적 영감을 고취시켰다. 1872년 자신의 첫 저서인 『비극의 탄생』을 완성시켰고, 이 책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조각이나 그림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폴론적인 것이고, 음악과 비극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정신을 몰입시켜 자기를 완전히 잊게 만드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것인데, 그리스 비극은 아폴론적인 '설명'과 디오니소스적인 '노래'를 합쳐서 '합창'이라는 형식을 탄생시킴으로써 그리스에 문화적 황금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미덕은 변증법적인 논리를 가져야 된다'면서 아폴론적인 것만을 강력히 주장한 뒤로부터, 그리스의 문학적 세계관에서 디오니소스적 몰입과 광기가 사라져 버렸고, 그리스 비극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런 맥락에서 바그너는 쇼와 음악이 합쳐진 오페라를 부흥시킴으로써,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이 재결합하는 새로운 비극적 예술의 형태를 제시한 사람이다. - 『비극의 탄생』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그리스 고전에 대입시킨 전략 ㅡ '표상'을 아폴론적인 것, '의지'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대입시키는 해석은 문헌학의 나쁜 사례라는 비판세례를 받았다. 문헌학은 문헌학적 방법으로 과거를 엄격하게 찾아가는 것이지, 형이상학적 철학을 이용해 과거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점차 깊숙히 빠지면서 기존의 문헌학적 방법에서 벗어나 철학적 해석을 시도했던 것인데, 고전문헌학자로서 그의 명성은 말그대로 박살나 버렸다.
- 바그너의 작품이 민족주의적이면서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띄게 되어 견해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서서히 바그너의 예술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 파울 레의 관점을 통해 바그너와 쇼펜하우어를 극복하고자 나온 책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책이다.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짧게 쓸 수밖에 없었는데, 강렬한 잠언식 글쓰기가 한층 더 심도 있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도덕은 초월적 기원을 가지지 않으며,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세대와 세대를 거쳐 전해진 도덕적 본성을 발전시켜 왔다'고 주장하는 진화윤리학자 파울 레 박사의 관점을 통해 『비극의 탄생』의 비판을 이겨내고자 하였으나, 몇 안 되는 충실한 지지자들마저도 버리는 결과가 되버렸다. 이후 1879년, 건강상의 이유를 대고 교수직마저 사임했다.
-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번갈아 돌아다니면서 2년간 방랑 생활을 이어갔던 1881년 7월의 어느 날, 스위스의 실스마리아. 병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로인한 고통은 비록 절망적이었지만, 고통의 깊이가 깊을수록 생각도 깊어졌다. 실바플라나 호숫가에서는 그가 나중에 '차라투스트라 바위'라고 부른 피라미드 모양의 거대한 바위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영원 회귀 사상'을 생각해냈다. 이를 바탕으로 1882년에는 『즐거운 학문』을, 1883년에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완성했다. 반향이 일지 않자, 자신이 이 책의 핵심사상을 성경 패러디로 감추거나 영웅의 서사적 전설로 포장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생각을 더욱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선악의 저편』을 썼다. 그 다음 책인 『도덕의 계보』는 『선악의 저편』의 내용을 더욱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 썼다.
- 1888년 9월부터 연말까지 어마어마한 양의 작업을 하게 된다. 자신의 정신상태를 예견했던 걸까. 『우상의 황혼』 탈고, 『힘에의 의지 : 모든 가치의 전도에 대한 시도』 구상, "안티크리스트, 자유정신, 부도덕자, 디오니소스" 4부작 구성 및 『안티크리스트』 탈고,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 『니체 대 바그너』 집필... 하지만 그의 정신은 붕괴되고 있었고, 지인들에게 보낸 크리스마스 안부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그 해 12월 크리스마스 무렵에는 광증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1889년 1월 3일, 한 마부가 말에게 심하게 채찍질하는 모습을 보고는 몸을 던지다시피 마부를 가로막았고,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는 목 놓아 울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전해진다.
- 그는 지속적으로 전체주의, 도덕주의, 국가주의, 종교, 실체론,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등을 비판하였다. 그런 그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 때문이었다.
1893년 유럽을 휩쓴 아방가르드의 열기로 그의 이름이 순식간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약삭빠른 여동생은 오빠의 책에 쏟아지는 국제적 관심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집에다가 '니체 문서 보관소'를 지은것이다. 2층에는 광증에 빠진 오빠를 둔 채로(혹자는 그녀가 그를 '전시'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1층에서는 사교파티가 벌어졌다. 특별 손님은 2층으로 올라가 먼발치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인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그는 그런 식으로 엘리자베스의 명성을 높여주는데 이용당했다. 이무렵 그는 정신이 붕괴된 상태였기에 여동생의 멍청한 짓거리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의 사후에는 저서를 짜집기( 『힘에의 의지』)해서 나치정권에 유리하게 아부하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위버멘쉬란 당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나치정권과 여동생이 공동으로 그의 사상을 왜곡한 결과, 확산된 인식이었던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1961년 《 니체 》를 출간하여 오늘날 그에 대한 이상한 오해는 거의 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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