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대 29대 300의 법칙

2015/04/04 17:35

1930년대 초 미국의 한 보험회사 관리인 H.W. 하인리히는
고객 상담을 통해 사고를 분석했습니다.
그 분석결과에 의하면,
노동재해가 발생하는 과정에 중상자 1명이 나오면
그전에 같은 원인으로 발생한 경상자가 29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 좋게 재난은 피했지만
같은 원인으로 부상을 당할 뻔한 잠재적 상해자가
30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를'하인리히 법칙' 또는
'1대 29대 300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대형사건 전, 반드시 전조가 있었을 겁니다.
그걸 대단치 않게 넘기고, 귀찮다고 덮어두고,
서로 아는 사이라고 적당이 눈감아주는 사이
눈덩이처럼 악재는 불어나고 어느 날 대형사고로 연결된다는 것,
우리는 수없이 겪어 알고 있습니다.

사후개선이 아닌 예방이 먼저입니다.
이제 안전불감증은 멀리 던져버려야만 합니다.


- 최선옥 시인

- 사색의 향기, 2014-05-16


2015/04/04 17:35 2015/04/04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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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2015/02/21 22:45

감나무를 심었다.
열매가 많은 것은 알이 작고
열매가 드문 것은 알이 굵었다.

나중에는 같이 잘 자라 그늘이 지기에
하나를 베어버리려 하니,

알이 작은 것은 싫지만 많은 것이 아깝고,
열매가 드문 것은 미워도 그 알이 굵은 것은 아까웠다.

내가 말했다.
'둘 다 두어라. 비록 단점이 있더라도 장점을 취할 뿐이다.'

- 이익,'관물편' 에서 -

고향집 감나무에 탐스럽게 익어가는 감을 보며
조선시대 근세 실학의 큰 별이었던
성호 이익 선생의 감나무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감나무 뿐만 아니라 사람도 그렇지요.
꽃도 예쁘고 향기도 좋은 꽃이 귀한 것처럼
한 가지 장점이 있으면 단점도 있게 마련입니다.
다만 어디에 시선을 두고 마음을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마음씀씀이에 따라
단점을 장점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고
장점마저도 단점으로 만드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 사색의 향기, 2013-09-24



2015/02/21 22:45 2015/02/21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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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2014/07/20 14:38

via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팔레스타인 분쟁 - 지도참조


[1]
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BC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AD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2]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 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채택하였다.


[3]
문제의 발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양자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아랍측에는 맥마흔선언, 유대인측에는 밸푸어선언)을 한것이다.

more..

영국의 선언으로 인해 양측 모두 팔레스타인을 갖겠다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후 네 차례(1947ㆍ56ㆍ67ㆍ73년)의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였다.


[4]
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5]
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6]
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7]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고, 그에 비례하여 아랍국가들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증대됨에 따라 그 동안 소외되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정치적 위상도 커졌다. 마침내 1973년 11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되었다. 유엔 역시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단순한 테러집단이 아닌 정치적 실체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8]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마침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 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 강 서안 헤브론(Hebron)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내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 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 강 서안에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중동 평화를 위한 여러 협정들이 체결된 결과 2003년 6월에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동평화로드맵'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9월 12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9]
한편,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아라파트의 죽음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효과적인 협상을 이룩하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아라파트 이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중도성향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는 평화 프로세스의 속개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2006년 1월 선거에서 압바스 정권을 부패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의 하마스(Hamas)가 다수당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4자 기구(Quartet)라고 불리는―미국과 러시아, UN과 EU는 향후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과거 합의사항의 준수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에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4자 기구(Quartet)가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진행된 선거결과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0]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하마스 간의 경쟁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정치적 이념적 헤게모니를 다투는 대안세력으로 발전해왔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참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지율 하락과 하마스의 성장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서의 간헐적 무력 충돌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쟁의 악순환을 형성한다.
팔레스타인 측이 압바스 정부와 하마스간의 불화와 권력투쟁으로 책임과 권위를 가진 대표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공식적인 평화 프로세스의 가동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더하는 요인이다.
2012년 2월 팔레스타인 온건파 파타와 무장정파 하마스가 단일 정부 구성의 실질적 절차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과도 단일 정부 총리로 추대하는데 합의한 것은 가자지구가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집권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조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파타와 하마스와의 합의가 평화 협상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아바스 수반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진척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더욱이 테러집단으로 지목하는 하마스와의 단일 정부 구성은 테러집단의 지원을 금지한 법안에 따라 미국의 지원과 협력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2014/07/20 14:38 2014/07/2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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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니파와 시아파

2014/07/13 17:12

같은 이슬람교이면서 왜 그렇게 싸우나요 (via 네이버 학생백과)


이슬람 선구자 무함마드의 사후 후계자 구도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다.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던 무함마드가 갑자기 사망하게 되자 당시 무슬림의 존경을 받았던 아부 바크르가 첫 후계자(칼리프)로 선출된다. 3대 칼리프였던 우마미야 가문의 우스만은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형성하고 코란을 정비해 교리를 체계화 한다.

종파 간 견해 차이 속에서 알리 이븐 아비가 4대 칼리프로 집권할 무렵 아랍 세계는 잦은 분쟁과 반란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657년, 시리아를 다스리던 옴미아드가(家)의 수장 무아위야가 알리의 지도력을 의심하며 반란을 일으켜 시핀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무아위야는 코란 구절을 창끝에 매달고 중재인을 내세워 협상을 하게 되고 알리와 무아위야는 동-서로 영역을 양분하는 협정을 맺는다. 알리의 협정이 나약한 결정이었다고 실망을 느낀 추종자들은 그를 떠났는데, 그 가운데 하와리지파는 후일 알리를 암살한다.

알리가 암살당하자 무아위야는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알리의 장남을 격파하고 우마이야 왕조를 세운다. 이 때 무아위야는 본래 선출 임명직이었던 칼리프의 지위를 세습화로 고정시켰다. 무아위야가 세상을 떠나고 아들 야지드가 칼리프가 되었는데 알리의 차남인 후세인 알 리가 야지드의 승계를 부정하며 자신의 추종자들을 모아 쿠파로 돌아가 봉기 계획을 세운다. 이에 680년 쿠파의 총독이었던 우베이둘라는 그들의 봉기를 인정하지 않고 카르발라에서 후세인 알리를 공격하여 그 일가를 괴멸시켰다.

마호메트의 외가 혈통이 무참히 살해당한 것에 분노한 시아파는 정식으로 수니파로부터 분파했다. 이것이 시아파와 수니파의 본격적인 분열의 시작이다.

선출된 칼리프를 추종하는 세력을 순니라 하고 이들을 수니파라고 한다. 무함마드를 최후의 예언자로 보고 코란을 최종적 계시로 삼으며 전 세계 무슬림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를 정통 후계자로 보고 그를 지지하며 만들어진 종파이다. 4명의 칼리프가 아니라 마호메트의 사위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유일한 후계자로 인정했다. 그들은 무함마드를 잇는 후계자도 신의 계시를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4대 칼리프 이후 우마미야 가문이 선출이 아닌 세습 체제로 이어가자 시아파는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정통 후계자이자 4대 칼리프인 알리의 가문에 칼리프 지위를 돌려주자고 주장하며 수니파에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수니'란 말은 코란과 함께 '무함마드의 순나(말과 행동,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시아'는 '알리와 그 후손들을 따르는 사람들(시아트알리)'을 말한다.

수니파는 정통파라고 자신들을 칭하면서도 융통성 있는 형식을 채택했으니, 외국인 칼리프까지 허용했다. 또한 새롭게 이슬람교의 우산 아래 들어오는 공동체의 관습을 허용하는 등 관용을 통해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

반면에 시아파는 초기에 이슬람교도의 공동체적 지배를 지지한 정치적 파벌로 시작해 훗날 종교적 운동으로 진화되었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세속적으로(다른 말로는 융통성 있게) 수용하는 데 반발하는 독실한 신자들과 아랍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던 비아랍계 이슬람교도, 즉 마왈리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수니파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다수를 형성하고 있고, 시아파는 이란,이라크를 포함한 걸프 지역 및 시리아,레바논에 소수가 거주하고 있다. 아랍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수니파와 페르시아인 대다수가 믿는다는 시아파는 종교문제뿐만 아니라 민족간 갈등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2014/07/13 17:12 2014/07/1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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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 효과

2014/07/13 16:13

지중해 어느 섬에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는 여인들을 멀리하고 오로지 조각에만 매달렸는데
어느새 자신이 만든 조각상 갈라테이아를 사랑하게 된다.
그녀를 껴안고 입을 맞추며
그는 매일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빈다.
저 조각상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그의 기도에 감동을 받은 아프로디테는
갈라테이아에게 생명을 주었고
피그말리온이 조각상을 껴안고 키스하는 순간
사람으로 변한 갈라테이아는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이처럼 무엇이 될 것이라는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대하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피그말리온 효과'다.

오늘날 피그말리온 효과는 교육은 물론 곳곳에서 응용된다.
긍정으로 무엇이 될 수 있다는 태도로 대해주면
상대는 거기에 부응해 노력을 하게 되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것.
부정하고 비난하기보다는 칭찬하고 긍정해
결국 더욱 좋은 결과를 얻는 효과라 하겠다.

- 최선옥 시인

- 사색의 향기, 2011-06-17



2014/07/13 16:13 2014/07/13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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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름 찾기

2014/07/13 15:48

'가까이에 있는 산은 항상 아내 같다.
바라보기만 해도 내 것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삼각산' 이다.
이 삼각산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산의 고유지명이다.

삼각산은 고려 성종 이래 일천년간 사용된 명칭이었으나
1900년경부터 북한산이란 명칭이 혼용되었고,
국립공원지정으로 공식화되었다.

그러나 꾸준히 명칭복원운동을 추진한 결과
2006년 북한산은 삼각산으로,
백운대는 백운봉으로 복원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지도와 표지판에는
아직도 북한산, 백운대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이 명칭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국토개발에 따라 새로운 지명이 생겨났는가 하면
고유지명이 사라지기도 했다.

옛이름을 찾는 일, 근원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 사색의 향기, 2010-09-24



2014/07/13 15:48 2014/07/13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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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고

2014/07/13 15:46

鳥宿池邊樹 僧推月下門 (조숙지변수 승퇴월하문)
'새는 연못가 나무에서 자고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민다.'

당나라 시인 가도가 나귀를 타고가다 시 한수 지었다.
그런데 민다는 뜻의 퇴(推)보다는
두드린다는 뜻의 고(敲)가 어떨까, 골똘히 고민하다가
그만 고관인 한유의 행차를 방해하고 말았다.
불려간 가도가 자초지종을 말하자 한유는 노여운 기색은커녕
'역시 민다는 퇴보다는 두드린다는 고가 좋겠군!'
하고 말했다.
이때부터 시나 글을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 하는데
문장을 다듬고 어휘도 적절한가를 살피는 일을 말한다.

글은 끝없이 고민하고 수정된 결과 독자에게 선보여진다.
좋은 글은 그만큼의 수고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수많은 퇴고로 수려한 문장으로 거듭나듯
단 한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는 듯하다.
매사에 꼼꼼히 다지는 일,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 사색의 향기, 2010-09-10

2014/07/13 15:46 2014/07/1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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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T

2014/02/04 21:08

Rizzoli.and.Isles.S04E01.We Are Family

#.

뭐 하는 거야?  
- What are you doing?

연필을 물고 있지  
- Biting on a pencil.

그래, 나도 보여. 그런데 왜?  
- Yes, I can see that. But why?

웃을 때 쓰이는 근육을 활성화시켜.
- It activates the muscles used for smiling.

연필 무는 게 효과가 있어?
- So... Biting pencils works?

이 자세로 치아를 유지하면 대협골근과 소근이 맞물리게 돼
- Well, holding your teeth in this position Engages the zygomaticus major and the risorius muscle.

몇몇 연구를 보면 특정 근육을 움직여서 행복한 것처럼 뇌를 속일 수 있어,
- Some studies show that you can trick your brain  Into thinking you're happy by moving certain muscles.


#.

이런 게 얼마나 위독한데? 
- How toxic is all that?

새 건전지는 꽤 깨끗하지만  낡은 건전지는 납과 카드뮴을 배출해
- Newer batteries are reasonably clean, But older batteries, they release lead and cadmium.

그게 노동자들 유니폼에 묻어 나올 수도 있을까?
- Could the workers carry that out on their uniforms?

응, '갖고 가는 독소'로 알려져 있거든
- Yes, it's known as take-home toxins.

THT, 갖고 가는 독소 (Take-Home Toxins)야.
- THTs. take-home toxins.



2014/02/04 21:08 2014/02/04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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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sign)과 수결(手決)

2014/01/31 19:33

인장의 활용은 감소하고 사인(sign)의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서류, 문서, 계약에는 물론이고 신용카드를 사용한 후에도 사인(sign)을 해야 한다.
사인을 떠나서는 살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사인(sign)의 사전적인 뜻은
'자기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고, 자신의 손으로 쓴 문자나 표시'이다.

우리는 때로 'sign'의 용어가 영어이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수결(사인) 자료가 많으며,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수결(手決)은 독특하게 고안한 글자나 문양을 서류나 작품 끝에 자신의 손으로 직접 표시하는 방법이며,
사인과 흡사하다.
단지 수결(手決)과 사인(sign)이 다른 것이 있다면 필기구다.
사인이 주로 펜을 사용하였다면, 수결은 붓을 이용했다.

결정의 상징적 표시인 사인(수결)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심사숙고한 사인(수결)은 성공의 길로 인도할 수 있지만,
즉흥적인 사인(수결)은 자칫 불행의 서막이 될 수 있다.
우리 모두에게 사인(sign)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 사색의 향기, 2009-02-06



2014/01/31 19:33 2014/01/3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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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大吉(입춘대길)

2014/01/31 19:31

立春大吉(입춘대길)


'立春'이란 절기가 처음 문헌에 나타난 시기는 중국 북위 때다.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조상들은 봄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대문이나 기둥에 立春大吉이란 춘첩자를 붙였다.

24절기 중 첫 절기인 '입춘'은 태양이 황경 315도의 위치이며,
입춘날부터 약 15일간을 입춘절이라고 한다.

立春(입춘)의 '立'은 '서다'가 아니고 '곧'이라는 뜻이다.
"곧 봄이다"란 입춘의 뜻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면,
입춘이 지났는데 계속되는 겨울을 원망할 수 있다.

"곧 다가올 봄에는 크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란 뜻의
'立春大吉'을 쓴 조상들의 슬기를 닮고 싶다.

- 사색의 향기, 2009-01-30



2014/01/31 19:31 2014/01/31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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