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2014/07/20 14:38

via [네이버 지식백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 팔레스타인 분쟁 - 지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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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3세기,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로부터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간 비슷한 시기에 남부해안 지역으로 해양민족인 필리스틴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이후 BC 1020년경, 이스라엘 민족은 필리스틴을 비롯한 가나안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다윗왕 영도 하에 통일왕국을 이룬다. 그러나 이후 분열하여 BC 63년경 로마에 의해 점령당하고 AD 135년경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통치되어 왔다. 아랍인들은 사라센제국의 건설 이후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예루살렘을 성도로 삼아왔다. 그 후 이 지역은 십자군 원정이 있었을 때 기독교도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한 기간을 제외하고는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결국 팔레스타인 지역은 서기 135년경 이 곳에 거주하고 있던 유태인들이 로마에 의해 추방된 후 아랍인들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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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반 유태인 운동이 전개되고 그에 대응하여 유태인들이 '조국 건설'을 목표로 민족주의 운동을 확산시켜 나가면서부터 팔레스타인 지역의 수난이 시작되었다. 유태인들은 1897년 8월 스위스의 바젤(Basel)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자회의에서 자신들의 조국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건설한다는 이른바 '바젤계획'을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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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발단은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전쟁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양자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아랍측에는 맥마흔선언, 유대인측에는 밸푸어선언)을 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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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선언으로 인해 양측 모두 팔레스타인을 갖겠다는 전쟁을 시작했고, 그 후 네 차례(1947ㆍ56ㆍ67ㆍ73년)의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등을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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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이와 같은 약속을 모두 저버리고 1920년 4월 상 레모(San Remo)회의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라크 및 요르단과 함께 자신의 위임통치 하에 편입시켰다. 영국은 그 후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오히려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유태인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태인들은 유럽으로부터 이 지역으로 대거 이주해오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 말 러시아와 폴란드에서의 반유태인 운동, 1933년 이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박해 등이 유태인의 이주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유태인들의 이주가 증가됨에 따라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유태인 토지 소유가 늘어났으며, 이것이 아랍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여 반유태인 운동을 촉발시켰다. 아랍인들의 반발은 반유태인 운동을 넘어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조직화로 나타났다. 아랍민족의 저항이 격화되자 영국은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지역 이주를 규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아랍민족의 협력을 얻어내기 위해 유태인 이주를 강력하게 억제하였다. 그러나 유태인들은 이미 준군사적 단체인 이르건(Irgun)과 하가나(Haganah)를 조직하여 반영국 테러를 전개하면서 국가의 창설을 추구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영국은 아랍민족과 유태인의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1946년 7월 양측간의 협상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는 유태인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렇게 되자 영국은 1947년 4월 유엔사무총장에게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특별회의를 소집하도록 하여 골치 아픈 이 문제를 유엔에 떠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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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1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UN Special Committee on Palestine; UNSCOP)가 설치되었다. 이 위원회는 팔레스타인문제에 관한 조사를 실시한 후 1947년 8월 보고서를 작성하여 유엔에 제출하였는데, 내부의 이견을 조정하지 못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태인의 지구로 분할한다는 다수안과 아랍인과 유태인을 포괄하여 연방국가를 창설한다는 소수안 두 가지를 건의하였다. 이에 아랍 측은 이를 모두 거부하고 소수민족의 권리와 성지 보호 의무를 지닌 팔레스타인 통일국가 수립 안을 독자적으로 제출하였다. 그러나 1947년 11월 29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표결을 통해 다수안을 채택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 구역과 유태인 구역으로 분할시켰다. 유태인들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반면 아랍 측은 거부하였다. 마침내 유태인들은 1948년 5월 14일 텔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을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국가를 수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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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의 지루한 전쟁이 잉태되었으며, 이후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이른바 '팔레스타인 전쟁'으로 불리는 제1차 전쟁은 이스라엘 건국 직후 이집트를 비롯한 7개 아랍국가들이 무력적 항쟁을 벌이면서 발생되었다. 이스라엘 측은 이를 독립전쟁 또는 해방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이 전쟁은 유엔안보리의 지속적인 중재로 1948년 11월 16일 중지되었으며, 1949년 2월 14일 이스라엘과 이집트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이스라엘과 레바논,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에도 휴전협정이 성립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이라크의 경우는 이스라엘과 별도로 휴전협정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랍 국가들의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 종결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80%를 차지하는 전과를 성취하였고, 팔레스타인인들은 90만 명이 유랑민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훗날 중동지역의 최대 골칫거리를 유산으로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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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아랍 측과 이스라엘 측간의 분쟁은 네 차례의 전쟁을 치른 끝에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국제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전쟁의 와중에서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고, 그에 비례하여 아랍국가들의 국제적 지위와 역할이 크게 증대됨에 따라 그 동안 소외되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정치적 위상도 커졌다. 마침내 1973년 11월 알제리에서 개최된 아랍정상회담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일하고 합법적인 대표로 승인되었다. 유엔 역시 총회 결의로서 팔레스타인 인민들에 대하여 외부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자치권, 민족 독립과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권리, 중동 평화 달성을 위한 중요 당사자로서의 지위 등을 인정하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대해 유엔 옵저버 자격까지 부여하였다. 이로써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단순한 테러집단이 아닌 정치적 실체로서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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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마침내 1993년 9월 13일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아라파트 의장과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이러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도 양측 간에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1994년 2월에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 강 서안 헤브론(Hebron)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1994년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이 차량 폭탄 테러를 자행하여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 내 예리코(Jericho)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 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 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 협정이 체결되었으며, 1995년 11월 2일에는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따라 요르단 강 서안에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중동 평화를 위한 여러 협정들이 체결된 결과 2003년 6월에 미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은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동평화로드맵'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05년 9월 12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였다. 이로써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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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팔레스타인 측에서는 아라파트의 죽음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효과적인 협상을 이룩하고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리더가 부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아라파트 이후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중도성향의 마흐무드 압바스(Mahmoud Abbas)는 평화 프로세스의 속개를 이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답보 상태에서 2006년 1월 선거에서 압바스 정권을 부패한 정권으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운동의 하마스(Hamas)가 다수당을 차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와 거의 동시에―4자 기구(Quartet)라고 불리는―미국과 러시아, UN과 EU는 향후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을 공식 인정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과거 합의사항의 준수해야함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보장되지 않을 경우에는 제재를 가하겠다고 공언하였다. 이는 사실상 4자 기구(Quartet)가 민주적이고 평화롭게 진행된 선거결과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 의사를 밝힌 것으로 볼 수 있겠다.


[10]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하마스 간의 경쟁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과정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 사회에서 정치적 이념적 헤게모니를 다투는 대안세력으로 발전해왔다. 문제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 참여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지지율 하락과 하마스의 성장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하마스가 장악하고 있는 가자지구에서의 간헐적 무력 충돌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더디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분쟁의 악순환을 형성한다.
팔레스타인 측이 압바스 정부와 하마스간의 불화와 권력투쟁으로 책임과 권위를 가진 대표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공식적인 평화 프로세스의 가동에 어려움을 줄 것이라는 전망에 무게를 더하는 요인이다.
2012년 2월 팔레스타인 온건파 파타와 무장정파 하마스가 단일 정부 구성의 실질적 절차로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과도 단일 정부 총리로 추대하는데 합의한 것은 가자지구가 하마스가, 요르단강 서안은 파타가 집권하는 비정상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주적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긍정적인 조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파타와 하마스와의 합의가 평화 협상을 포기하는 행위라고 비난하며 아바스 수반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진척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더욱이 테러집단으로 지목하는 하마스와의 단일 정부 구성은 테러집단의 지원을 금지한 법안에 따라 미국의 지원과 협력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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