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아서

2005/02/18 10:59

몸이 안좋으시던 내 어머니는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못하셨었다. 집안에 홀로 지내시는 일이 많으셨는데, 그나마 커다란 창문을 통해 사시사철 옷을 바꿔입는 산이 보였기에 그의 모습을 보며 지내시곤 했는데 이따금 등산하는 사람들이 지나가면 그들의 행동을 구경하시는게 위안거리였었다.
어머니는 곳잘 갈래머리 어린시절의 고향마을 이야기를 하곤 하셨다. 너른 들판을 향해 마음껏 뛰놀던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리우셨던 것이리라..
그런 어머니께 내가 해드린 최고의 선물은 -지금 생각해보면- 김용택님의 책을 선물해드린 것 같다. 어머니와 같은 정서를 갖고 있는 이 님의 책을 읽고 행복해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누이야
오늘도 나는 해거름에 넋 놓아
강 건너 묵어가는 밭들을 바라본다.
어릴 때 너를 업어 잠재우며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밭을 보노라면

언제는 패고
언제는 쓰러졌다 일어나
무릎 짚고 익어 있던
앞산 보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너의 가지런한 숨소리를 들었었다.

누이야
나는 그때까지 낀 내 손이 저려왔어도
무거운 줄을 몰랐었다.

어머니는 날마다 힘이 부치지만
네가 자라 가꿀 보리밭 명밭 콩밭을 부지런히 넓혔었지.
뒷산 그늘이 내려와 강물에 드리워지면
풀꽃들이 서늘히 드러나고
산그늘이 앞산을 오르며
어머님을 덮으면
허리를 펴며 땀을 식히시던
어머님의 넉넉한 노동의 하루.
그러면 나는 잠든 너를 산그늘로 덮어 잠재우고
부지런히 저녁 밥솥에 불을 땠었다.

지던 해가
앞산 머리에 뚝 떨어지면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서
줄줄이 풀 속을 내려오던
어머님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들,
함께 강가에서 만나 손발을 씻던
그 싱싱한 모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나는 즐거워지고
가슴이 뛴다.
김용택 - 섬진강 21 누이에게 중


동갑내기 시인의 섬진강 이야기는 해남출신 어머니에게 더없는 즐거움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눈앞에 그려지는 고향마을 이야기에 시름은 사라지고 온 내몸을 적셔오니 이보다 더 큰 기쁨 어디 있으랴.
낭랑한 목소리로 글귀를 읽어내리던 그날의 모습..

며칠전 도착한 김용택님의 신간 '풍경일기_봄 花' 를 꺼내들고 울컥하는 마음에 차마 책장 들춰보지도 못하고 가슴이 비어져내리더라. 어머니 생각이 참 많이 떠오르게 되어서.
이제야 책장을 열어보고 어머니께 선물해드렸으면 무척 좋아하셨을 모습이 떠오르니, 팬레터라도 써보라고 할걸 그랬다. 바쁜 그 님이 답장을 해줬을리 모르지만은, 책을 읽고 글을 써내려가던 어머님을 떠올리니 그랬더라면 참 좋았을걸 싶은 생각이 든다. 좋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었을것 같은데.

2005/02/18 10:59 2005/02/18 10:59

(#Hashtag) 같은글

TAG

Trackback

Trackback Address :: http://ham-gge.com/ttd/trackback/235

Comments

What's on your mind?

댓글 입력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