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flow, let it go, let it be

2004/04/16 00:17

우발적인 여행. 어머니가 내게 말했다.
하루만 월차 휴가를 낼 수 있느냐고. 어머니와 함께 어디를 가 줄 수 있느냐고.
집 앞에서 택시를 탔고, 겨우 5분만에 종로 5가에 닿았을 때, 어머니는 이제 내리자고 했다.
어머니는 한의원으로 들어가자고 하셨고, 나는 어머니가 커다란 병을 얻은 줄로 알았다.
한의사 선생이 나왔을 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리 애 좀 봐 주세요."
"엄마, 미쳤어요?!"

어머니는 단호했다.

"넌 아파. 가만히 있어."

한의사 선생은 내 팔목을 잡았다.
진맥을 마친 한의사 선생의 첫마디는 내 몸 안의 피를 완전히 거꾸로 돌게 만들었다.

"젊은 친구가 무슨 큰 충격을 받은 일 있었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머리로는 다 잊은 줄로 알고 있었는데, 내 몸은 2년이 지나도록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탯줄이 이미 30년 전에 끊어졌는데도, 어머니는 여전히 내 몸을 나보다 더 민감하게 진단하고 있었다.
양심적인 한의사 선생이 보약은 필요없다며 지어 준 한약을 먹으면 한없이 졸음이 왔다.
그 졸음에서 달아나기 위해 나는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 직장을 얻기 전, 잠시 서울을 떠나고 싶었다.

13년을 함께 붙어다니다시피 했던 사람과 한번도 여행을 함께 떠나지 못했다면 믿겠는가?
인생은 그렇다.
세월은 언제나 아주 넉넉히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다 어느 날 아주 간단하게 세월은 우리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세월이 사라진 그 허공에 무수한 약속들이 날아다닌다.
나도 그곳에 가고 싶어. 너도? 우리 가자. 다 때려치우고 가는 거야.
소년들의 약속…….

약속은 지켜졌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그 곳으로 떠났고, 그는 내 꿈에 실려 그곳으로 왔다.
인도에서의 첫 밤.
800원짜리 호텔 파라곤 4인용 방에서 잠자던 여행자들은 한밤중 내 비명소리에 놀라 일어나야 했고, 다음 날 아침 내게 물었다.

"어젯밤 악몽 꿨니?"

나는 지금도 그 꿈의 일부분을 기억한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아직 어린 아이였을 때, 사촌누이가 세상을 떠나고 내 꿈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가 내게 해 주신 말씀을 기억한다.
정 떼느라고 그렇게 무섭게 꿈에 나온단다.

홀로 흘러다녔다.
캘커타, 샨티니케탄, 다질링, 카트만두, 포카라, 보드가야……
어디에 가든 언제나 동행을 만났다.
동행. 同行. 같은 길을 가는 사람.
길이 언제까지고 같을 수는 없다.
첫여행이었으므로, 길에서 헤어지는 일에 아직 길이 들어 있지 않았으므로.
아, 헤어지는 일은 언제나 참 힘이 들었다.
이등칸 밤기차의 침대 위에서, 장거리 버스의 딱딱한 의자 위에서 나는 홀로 흔들리며 흘렀다.
흐르다가 큰 강물에 합류했다.
갠지스 또는 강가(Ganga), 바라나시 또는 베나레스(Benares).

아침에 눈을 뜨면 강물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는 방이었다.
자명종 없이도 언제나 새벽 해가 뜨기 전 눈이 먼저 떠졌다.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물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는 일,
어린 아이들이 젓는 쪽배를 타고 강물 따라 흐르다가 거슬러 올라오는 일,
강둑에 앉아 지는 해를 보는 일…….

매일 꽃을 샀다.
매일 꽃을 강물에 던졌다.
죽은 개의 시체가 흐르던 강.
그 강물 위에 언제나 무수한 꽃들이 흘렀다.

날이 흐렸다.
강물에 지는 석양 또한 오렌지빛이었다.
다시 강가에 앉았다.
다시 그가 내 옆에 따라와 앉았다.
어느 새 사진 속의 모습으로만 기억나는 얼굴.
울고 싶었던가?
그럴지도 모른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할 수 있다.
그 저물녁의 평화가 얼마나 큰 슬픔인가를 자꾸 되씹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나다가 잠시 휘청 흔들렸다.
그대로 쓰러져 버리기를 원했지만 쓰러지지 않았다.
세상과 내가 무게 중심을 모두 잃어 허공에 둥실 띄워진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누구에겐가 기대고 싶었다.
평화 속에 홀로 있는 외로움.
아이들은 1루피를 달라고 외쳐댔고, 마약상들은 파리처럼 내 귓전에 하시시, 마리화나를 외쳐댔다.
그럼에도 그 평화는 깨지지 않았다.
평화가 크고 깊으면 슬픔이 된다.

게스트하우스의 계단 왼편 문설주에 룽기(인도 남자들이 입는 스커트)를 입은 금발의 청년이 앉아 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하도 평화로워서 잠시 오른쪽 문설주에 기대 앉았다.
눈인사를 나누고, 그가 물었다.

"티벳에서 왔니?"
"아니, 한국에서"
"인도에 왜 왔니?"
";몰라, 그저 오고 싶었어"

그는 다시 강물로 얼굴을 돌렸다.
나도 강물로 얼굴을 돌렸다.
그의 입에서 세 음절의 단어가 빠져 나와 내 귀로 흘러왔다.
옴 샨티, 옴 샨티…… 샨티, 평화.
최면처럼 내 입에서 느리게 말들이 빠져 나왔다.

"나는 이곳에서 처음 죽음이 평화가 되고, 평화가 슬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나는 언제나 평화는 가볍고 밝은 것이라고 알고 있었어.
이렇게 무겁고 어두운 평화는 무엇이지?"

나는 그를 쳐다보지 않으며 이야기했고, 그도 강물에서 얼굴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Let it flow, let it go, let it be. "

오렌지빛 석양이 스러지고 어두워졌을 때 그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묻지 않고 헤어졌다.
렛 잇 플로우, 렛 잇 고우, 렛 잇 비…….
어두운 밤, 강물 위에 촛불 몇 개가 흔들리며 흘러갔다.

다섯 번 강물 위에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보았다.
해가 뜰 때면 어김없이 눈이 떠졌다.
네 번째 새벽녘 그가 다시 내 꿈으로 왔었다.
비명을 지를 필요는 없었다.
베나레스에서 내 꿈으로 들어온 그는 그저 편히 잠시 머물다가 떠났다.
베란다에 올라가 떠오르는 해를 보며 나는 이미 떠난 그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대를 위해 꽃 한 줄 바친 것을 어머니 갠지스에 감사하나니,
친구여, 그대가 항상 뒤집어 쓰고 다니던 절망을 이제는 버린 후 이기를,
오직 평화만이 그대와 함께 하기를,
다시 이 지옥에 태어날 때에는 그저 행복한 젊은 부부의 아이로 태어나기를,
안녕, 친구여. 내일 나는 베나레스를 떠날 것이네.

평화가 두려워 달아난다면 믿겠는가?
나는 평화를 보았다.
평화의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힘의 실체를 보았다.
사람을 취하게 하고, 모든 욕망을 희석시키고, 종내는 저 갠지스처럼 흐르지 않는 듯이 흐르게 하고야 말 힘.
위대한 허무.

평화가 있는 곳에 곧 허무가 함께 하느니.
그대의 삶이 온통 평화로 가득해지는 날, 곧 그대의 죽음일 터이니…….

베나레스를 떠나던 날, 다시 한번 새벽 흐르는 강물에 몸을 띄웠다.
어린 아이가 젓는 쪽배에 올라 떠오르는 해를 받으며 물결을 따라 흘러갔다.

렛 잇 플로우, 렛 잇 고우, 렛 잇 비.

인도로 돌아갈 때마다 베나레스로 돌아갈 수 있기를 꿈꾸었다.
세 번을 인도로 돌아갔지만 베나레스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이유를 궁금해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내 발길이 그렇게 흘렀을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이미 내 몫으로는 충분한 평화를 얻어 왔다.
인생은 강물이다.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또는 흐르지 않는 듯 흐르는 강물.
그 강물에서 잠시 만날 뿐이다.
모든 삶은 결국 강물에 실려 가는 여행이다.
강물은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꽃도, 어느 촛불도 머물지 않는다.
흐르다가 보면 언젠가 그 강물에 다시 합쳐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내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강물을 바라보며 읊조리는 그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흐르게 하고, 떠나게 하고, 그저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나지막히 읊조리는 그 사람.
어쩌면 이미 수천 번 그 사람을 만났던 것인지 모른다.

- 조병준 / 렛 잇 플로우, 렛 잇 고우, 렛 잇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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