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는 영국에서 태어난 극작가이다.
1585년 경 런던 극장에서 일하면서 배우로서 무대에 서고 극작가로서 대뷔한다. 1592년 경부터 극작가로서 인정받아 약 20년 동안 37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세익스피어의 극은 궁정 사회나 생활사정, 의학적 지식, 법률, 박물학, 여러 외국 정보에 정통하고 희대의 교양을 갖춘 자가 아니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한 일부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이라는 촌에서 결코 유복하다고 할 수 없는 집의 아들로 태어나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았고 그 이후 독학을 한 흔적도 없는 그가 실제 작품을 쓴 것이 아닐 것이라고 의혹을 갖게 되었다.
1592년경부터 극작가로서 인정되었지만 1985년경에 런던으로 간 무지한 시골 청년이 7년 만에 희대의 박학을 갖추는 일이 정말 가능했을까. 다른 정서적인 작가의 흉내라면 몰라도 그 희대의 극작가 세익스피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ㅡ. 고 생각한 것이다.
그럼 문호 세익스피어가 성 트리니티에 잠들어있는 그 남자가 아니라면 진짜는 누굴까. 연구하기 시작한 그들은 당시 박학다식하고 세익스피어 극을 쓸 수 있는 인물이라면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렌시스 베이컨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프렌시스 베이컨은 16세기 영국에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당시 런던 교외였던 스트랜드의 요크하우스에서 태어났다. 베이컨의 아버지 니콜라스 베이컨은 국새상서라는 직책에 있었다. 그것은 국왕의 다음가는 요직(총리대신, 국새상서, 대주교) 중의 하나이다.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베이컨은 12살에 캠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 2년 후 캠브리지를 중퇴하고 그레이즈 인(법학원)에 들어간다. 아버지와 같은 법률가로서의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3개월 후 아미아스 포레트 경이 주불 대사에 임명되자 베이컨은 수행원으로 그를 따라 프랑스로 간다. 파리 체제 중, 외교관으로서의 일을 익힐 겸 농업이나 정치학, 금속, 지질학 등을 공부하였다.
1579년 폐렴에 의한 아버지 니콜라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런던으로 돌아온다. 8명 형제에 의한 유산 분배는 당시의 관습대로 장자가 상속, 베이컨은 약간밖에 받지 못했고 고아가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 1616년까지의 약 37년 간이나 베이컨은 빚으로 고생하게 된다.
베이컨은 21살에 법정변호사의 자격을 취득하고 궁정에 자리를 요청하지만 그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1584년 하원의원이 되지만 계속 빚에 시달린다. 1593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고문관이 된다. 이걸로 드디어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보겠지만, 베이컨의 결정적 출세의 방해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너무나 권력에 집착하는 베이컨을 달갑지 않게 생각한 데에 있었다.
그 후에도 빚은 늘어나기만 했고 1598년 빚을 갚을 수 없게 되자 한 때 구속된 적도 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제임스 6세가 즉위한다. 1604년 제임스의 왕실변호사가 되지만 그건 소위 명예직 같은 것이며 실제 수입이 많지는 않았다. 1607년 드디어 법무차관이 된다. 1611년 베이컨은 법무장관이 된다. 그리고 정적 에드워드 코크의 실각이후 1616년 추밀원 고문관이 되어 드디어 염원하던 출세의 길에 오른다. 같은 해 4월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죽었다. 다음 해, 베이컨은 아버지와 같은 국새상서가 된다. 그 후 대법원이 되고 다음 1618년 대법관에 임명되어 남작의 직함을 얻는다. 1621년 공직을 은퇴하고 집필 활동에 전념,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6년에 서거.
진짜 세익스피어 A - 성 트리니티 교회에 잠든 세익스피어 B - 베이컨 C
A는 B일까 C일까.
당시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의 연극은 인정받지 못했다. 길거리 약장수보다 조금 나은 정도나 매춘과 비슷한 정도의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B가 A라면 왜 마을로 몰래 돌아가 조용히 죽은 것일까. 왜 런던에서의 성공을 숨길 필요가 있었을까. B는 이름은 빌려줬지만, A가 아니기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A가 C라고 가정해보자.
특권계급으로 태어난 그는 출세욕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보통의 출세욕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법률학의 정점에 다다르는. C가 A라 고백하지 않은 이유는 극작가가 아직 매춘과 동등 정도의 직업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엘리자베스 왕조 시대에 자살행위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베이컨은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극작가가 되었던 것일까.
야심에 넘치는 그도 돈 문제로 늘 고민했는데, 돈을 꾸는 곳은 언제나 형 안소니에게서였다(안소니가 남긴 날짜가 들어간 차용서는 다수 발견되었다). 베이컨이 50대에 출세하기 전까지 형 안소니가 650파운드는 빌려줬을 거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으로 계산해봐도 형 안소니로부터 받은 원조의 세배는 필요했을 거라고 역사가들은 보고 있다. 그렇다면 거의 제대로 된 수입이 없었던 베이컨은 그것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A=C 이다는 설에서의 결정적 가설.
C와 B는 어찌하다 알게 되었다. B는 배우출신의 보잘것없는 극작가였다. 그래서 계약금의 절반을 받기로 약속하고 C는 B의 이름을 빌려 A의 작품을 쓴 것이다. 아무리 A가 유명해져도 B도 C도 세상에 나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B가 A라고 하면서 세상에 넉살좋게 나온다면 B의 무지가 탄로가 나, 그 결과 C도 드러나가 될 것이다. 약속은 지켜졌고, B는 A에게 받은 돈으로 약간의 돈을 모으게 된다. 그것을 갖고 B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한 노후를 즐기고 숨을 거둔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1611년 '헨리 8세'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그만뒀다. 이 해에 베이컨은 염원하던 법무장관이 되었다.
세익스피어는 실은 다른 사람이고 존재하지 않았다 는 설은 모든 국민의 가장 성스러운 신념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단언하는 영국인의 반감을 살 것이다. 하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가절이 아닐 수 없다.
Z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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