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와 그 시대

2025/10/05 12:19

7인의 세익스피어 중  여러가지  
글/사시 아키히로(고베 시 외국어 대학 교수)

역사는 어떻게 전해지는 것인가?

7인의 셰익스퍼어는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둔 픽선'이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당시의 상태를 밝혀주는 기록은 어떤 식으로 남겨지는 것일까?
 우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남겨주는 경우가 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의 원전으로 사용한 토마스 모어의 『리처드 3세전』은 실제로 리처드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그래서 리처트가 악인으로 설정되어있음) 인물한테서 얻은 정보 등도 참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동시대의 저작이나 공적인 기록. 전승 등이 많이 모여서 더 큰 역사서가 정리된다. 이것도 셰익스피어의 원전이 된 『홀린셰드 연대기』 등이 그 사례다. 역사서라는 것은 역사서가 축적 .되어 만들어지고, 그 역사서를 축적해서 또 다른 역사서가 만들어지는, 그런 구조로 되어있다. 학교의 역사 교과서도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국가나 지방을 움직이는 정치가도 날마다 다양한 문서를 사용하며 일을 했다. 지금 같으면 공문서로 보관되어야 하는 물건이지만, 그 당시에 그런 문서들은 개인 소유물로 간주되었는지 퇴직할 때 들고 간 것 같다. 엘리자베스 여왕을 지지한 정치가 윌리엄 세실도 마찬가지라, 대량의 문서가 세실가에 보존되어 있다가 후세에 전해졌다.
 역사 기록은 그러한 학자나 정치가들이 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일기나 비망록이 남는 경우도 있다. 본 작품에도 등장하는 흥행주 핸슬로우가 남긴 일기는 그 대부분이 매일의 회계장부 같은 내용이지만, 그것이 당시 연극계의 경영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이 일기는 다른 기업의 회계장부의 이면지를 사용한 것 이었는데, 헨슬로우의 사후. 그 밖의 유품과 함께 대학에 기증되어 오늘날까지 남게 되었다. 수완 좋은 흥행주 필립 핸슬로우는 의외로 글을 부지런히 썼다. 개인의 기록이 남으려면 후계자가 의도적으로 보존해주지 않으면, 그대로 광 속에라도 방치되어 먼지를 뒤집어쓴 채 기적적으로 남는 걸 기대하는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현재도 '보물 탐험'에 의해 광들이 열리거나 오래된 저택의 열리지 않는 상자가 열려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는 이유다.
 사람들의 습관이나 행동도, 그 당시 많이 집필된 매너 지도서나 사람들의 행동을 비판하고 세상을 탄식하는 서책율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너무 당연한 것은 의외로 기록에 남지 않는 법이다.
 과거의 상태를 가르쳐 주는 것은 비단 글자뿐만이 아니다. 그림으로 그려져서 그 실태를 알 수 있는 경우도 많다. 거리의 상태, 사람들의 의복, 식사하는 모습 등. 문장만으로는 이미지가 잘 떠오르지 않는 것도 그림이라면 일목요연하다.

홀린셰드 연대기

 셰익스피어는 역사극이나 비극을 쓰기에 앞서 그 원소제를 대부분 「홀린셰드 연데기」라는 역사서에서 찾았다. 정식 제목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대기』지만, 이 책을 편집해서 출판한 라파엘 홀린셰드라는 인물의 이름을 따라 그렇게 불린다. 원래는 다른 업자가 계획하고도 완성하지 못한 장대한 「세계지」 기획을 이어받아 영국과 관련된 부분만 간행한 것이다. 영국의 고대부터 현대까지를 다룬, 그 당시에는 가장 자세한 통사(通史) 중 하나이고, 좋은 평판을 받아 10년 후에는 보강된 제2판이 등장한다. 당시 고가였던 서적이 제판된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많았다는 뜻이다. 셰익스피어가 이용한 것은 이쪽 버전이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16세기, 이러한 역사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당시의 튜더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그 정통성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그때, 그 권위를 증명하며 뒷받침할 역사서가 필요해서 국왕 본인도 역사가에게 그러한 저작을 의뢰했다. 가령, 고명한 학자있던 토마스 모어는 헨리 7세의 요청으로 리처드 3세의 전기를 썼다. 왕의 악행을 증명해서 리처드를 쓰러뜨린 헨리 자신의 공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모어가 쓴 극악무도한 리처드의 이미지는 셰익스피어에계도 계승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들어서면서 학문이 더욱 발전하고, 역사에 대해서도 연구가 진행되었다. 엘리자베스 본인도 가톨릭 국가를 중심으로 한 외국의 비판을 상대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서가 필요했다. 물론, 서책 같은 건 읽지도 않고 학교와도 인연이 없는 서민들에겐 극장에서 역사극을 보는 것이 영국 역사의 흐름과 누가 훌륭한 왕이고 누가 나쁜 왕인지 그 해석을 알게 되는(즉, 배우는) 기회였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후, 셰익스피어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엘리자베스의 탄생 장면이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역사극 「현리 8세」를 쓴다.

꿈의 무대, 연극인의 꿈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시대에서 연극은 오락의 왕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민들은 일도 내팽개치고, 중요한 교회 예배에도 나가지 않고 다 극장으로 몰려갔다고 한다. 그래서 행수들에게는 '일꾼들이 일을 안 한다'라고 욕을 먹고, 고지식한 성직자들에게는 '악마의 소행'이라고 비난받으며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당연히 일이나 지루한 설교보다는 잠시나마 고된 노동을 잊어버리고 두근두근 설레게 만들어주는 극장이 몇 배는 즐겁지 않겠는가?
 런던에 극장이 지어지고, 언제든지 연극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셰익스피가 알려지기 조금 전이었다. 그 전에도 연극은 있었지만 상설 극장은 없었던 것이다. 연극은 여관 중정 등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당연히 무대장치도 비루했음에 틀림없다. 극단도 순회공연이 일반적이라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이때 처음으로 상설 연극용 극장을 만들어 성공한 일명 '시어터 극장'을 런던 변두리에 지은 것이 제임스 버비지다. 1576년도의 일이니 셰익스피어가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불과 십여 년 전이다.
 극장이 생김으로서 사람들은 언제든지 연극을 볼 수 있게 된 셈인데, 극장 측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순회공연인 경우, 같은 공연을 반복하더라도 공연장소만 바뀌면 관객들도 바뀌기 때문에 레퍼토리가 많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상설 극장은 단골손님들을 상대로 상연해야 되기 때문에 마냥 같은 공연만 계속할 순 없다. '신작'을 계속해서 상연하지 않으면 손님이 금세 발길을 끊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극작가들에게 일감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관객의 흥미를 끌만한 새로운 작품을 써주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같은 극작가에게는 찬스가 찾아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배우들도 극장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차 안목이 높아지는 관객들을 상대로 마음을 붙잡을 수 있는 연기를 해야만 했다. 화려한 동작으로 끌어당기거나 절묘한 대사로 매료시키거나 그 개성으로 팬들을 획득하면 성공이었다. 인기인에게는 응당 보수도 따라온다. 연극으로 한 재산 벌어들여 그후에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버비지의 시어터 극장

런던에 세워진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 극장이 제임스 버비지의 시어터 극장이다. 「극장」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붙인 이름. 다만 「최초의 본격적인 상설」이라고 한정지어 표현하는 것은 시어터 극장이 생기기 얼마 전에 레드 라이온 극장이라는 단기간에 폐쇄된 상설 극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 연극은 여관 중정 등지에 만들어진 무대에서 상연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연히 여관이 본업이라 의욕적인 연극일수록 더욱 흥행에는 불편한 점들도 많았다고 한다.
 배우이기도 했던 버비지가 극장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그것이 기업으로서 유망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여왕도 자신의 극단을 조직하는 등 연극의 인기는 흔들림 없는 경지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런던의 시정 당국은 종교 도덕 측면에서 연극에 엄격한 태도를 취하고 있어 시내에 극장을 건설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버비지는 교외를 주목한다. 런던의 북쪽 쇼디치. 이곳이라면 당국의 입김도 잘 닿지 않으니까. 상재가 뛰어나고 빈틈이 없었던 버비지는 교묘하게 막대한 자금을 조달해 종전에는 본 적도 없는 형태의 극장을 만들어냈다. 시어터 극장은 원형에 가까운 다각형으로 되어 있다. 심지어 3층 건물. 멀리서 보면, 성의 탑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원형은 「세계」 자체를 표현했다는 설도 있다. 그야말로 연극은 이 세상의 꿈을 응축시킨 소우주였다. 이러한 극장을 훗날 셰익스폐어는 「목조의 O」라고 표현했다.
 그 후 런던에는 로즈 극장, 백조 극장 등 잇따라 극장이 건설되기 시작한다. 극장들은 하나같이 안정적인 홍행을 위해 인기 극단을 끼고 있으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신작 연극을 원했다. 이렇듯 극장은 서민들의 오락의 전당이 되어갔다.
 비비지의 사후, 그의 아들들이 물려받은 시어터 극장은 1599년에 토지 임대차 계약의 기한 만료에 따른 말썽에 휩싸인다. 건몰까지 몰수당하계 생기자 그걸 피하려고 눈 깜짝할 사이에 기책에 나선다. 땅주인 모르게 극장을 해체해서 템스강을 사이에 두고 런던의 남쪽 반대편에 위치한 서더크로 자재를 운반한 것이다. 그곳에 다시 세우고, 규모도 확대해서 새로 태어난 것이 셰익스피어의 창작 활동에 후반 무대가 되는 글로브 극장이다.

연극을 즐기는 법

셰익스피어 시대에 연극을 즐기는 법은 현재와 크게 달랐다. 그것은 당시 극장의 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무대 바로 앞의 바닥 자리는 입장료가 제일 싸지만 그마저도 좌석이 없어서 관객들은 연극을 서서 보았다.
 연극이 상영되고 있는 동안 꽤 웅성웅성 거렸다. 옆에 있는 관객과 서로 감상을 주고받았을 수도 있고 배우에게 성원을 보내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연극이 재미없으면 욕설과 노성도 지른다. 그러다 보면 관객들도 목이 마르고 배도 고프다. 그런 관객들을 노리고 장사꾼이 관객들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별로 크지도 않은 극장에 꽉꽉 들어찬 관객들. 판매원도 목청을 키우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고, 관객도 판매원을 부르지 않으면 물건을 살 수 없다.
 이러한 관객들을 상대로 연극을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관객들을 웃기고 관심을 연극에 쏠리게 만들고 조용해졌을 때 감동적인 결정적 대사로 눈물을 자아내는, 완급 자유자재의 테크닉이 요구되었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등은 관객층에 맞춰서 대본을 편집했다는 설도 있다. 서민들이 많으면 음담패설을, 상류층이 많으면 철학적으로 말이다.
 당시 사람들은 연극을 보면서 무엇을 먹었을까? 역시 음료수는 에일. 홉을 사용하지 않은 맥주 같은 것을 말한다. 홍차도, 커피도 아직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 음료수라면 응당 술이었다.
 그렇다면 음식은? 간편한 것은 사과나 배처럼 단단하고 잡기 편한 과일이나 견과류일 것이다. 오렌지도 당시에 꽤 많이 수입되었으니 조금 비싸긴 해도 남들 앞에서 살짝 우쭐대며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먹다 만 사과를 마음에 안 드는 배우나 관객에게 투척하기도 했을 것이다. 퍼석퍼석한 빵 덩어리를 주머니에 푹 찌르고 와서 주문한 에일로 흘려넘기는 것이 서민답게 요기하는 방식이있을 것이다.

돈의 단위

본 작품에선 『돈』이 꽤 중요한 모티브를 이루고 있고 다양한 화폐도 등장하고 있다. 다만, 그 당시 돈의 양상은 현재와는 사뭇 달랐다. 우선 단위부터 설명하자.
 현재 영국 통화의 기본은 「파운드」고,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가치는 전혀 다르다. 현재의 수천 배나 가치가 있었다. 당시 영국에서 사용되던 통화 단위로는 그밖에 실링과 펜스가 있었다. 12펜스가 1실링, 20실링이 1파운드다. 10진법이 아닌 것이다. 이상한 환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현대의 화폐는 '화폐가 가리키는 가치'와 '사물로서의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다. 100엔싸리 돈전의 가치는 20~30엔 정도라고 하는데, 1엔짜리 동전은 2엔 이상 들어간다고 한다. 지폐는 단순한 종이다.
그에 비해, 셰익스피어 시태의 화폐는 「원칙적으로」 화폐의 소재인 '귀금속의 가치'가 고스란히 '화폐의 가치'가 되었다. 1파운드짜리 금화는 1 파운드의 가치를 가진 금이라는 게 그 명분이다. 그래서 화폐에 함유된 귀금속 양에 따라 가치가 정해졌다. 당시에 유통되었던 화폐를 예로 들자면, 소브린 금화는 30실링, 엔젤 금화는 6실링 8편스, 크라운 은화는 5실링이라는 식이다. 이렇듯 중세 이후 여러 종류의 화폐가 만들어졌는데, 각각 독립된 화폐로 사용된 것 같다. 실제로 각 화폐에 함유된 금은의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복잡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20실링이 1파운드가 되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23실링이었다는 가격 표기도 있다. 실링 동전 23개와 같은 가치라는 뜻이다.
 해외의 금화, 은화도 유통되었던 시대. 일일이 교환 비율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프랑스 금화로 몇 개, 영국 소브린 금화는 몇 개, 실링 동진은 몇 개' 라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 그런 교환 규칙이 차츰 정리되면서, 앞에서 말한 10진법도 아닌 기묘한 통화 단위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복잡한 환산은 전통 있는 나라답게 20세기까지 남아있었다. 1971년에야 겨우 10진법으로 이행해 100펜스에 1파운드가 되었고, 실링은 사라졌다.
 당시에는 아직 지폐가 유통되지 않았다. 재료의 가치가 곧 화폐의 가치인 시대. 종이에서 가치를 발견하기란 무리였다. 단순한 종이를 돈이라고 인정하게 만들려면 그결 발행하는 은행이 신뢰를 받아야 하는데, 그러한 존재가 아직 없었던 것이다.

출세의 꿈
"몰락한 명문가의 넷째 딸은··· 옛날 같으면 수도원행이라고!"
 셰익스피어의 부친은 문장원에 문장 사용을 인정받으러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했다. 문장 사용이 허용되는 것은 명문가라는 증표로 그에 걸맞는 재산과 수입이 필요했고 신고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도 들어갔다. 신분 질서가 현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엄격했던 엘리자베스 시대. 사회적으로 상승하고 상류 계급에 합류하는 것은 수많은 서민들의 꿈이었다. 대부분 이루지 못하고 도중에 깨어버리는 꿈이었으나,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니있다.
 명문가, 상류 계급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장래가 보장된 것도 아니었다. 가문을 계승하는 것은 장남뿐. 차남 이하는 「태생에 걸맞는」 지위에 머물기 위해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도 그러한 차남, 삼남의 원망 어린 푸념을 그린 장면이 나온다. 영국 사회는 실속이 없는 「이름뿐」인 명문가에 엄격했다. 그 직위에 어울리는 생활을 해야 비로소 상류 계급이었다. 「태생이 좋다」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쓸모도 없었던 것이다. 상류 계급의 후계자 외에 다른 자식들은 상류층으로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야만 했다. 성적이 우수하고 주위의 지원이 있으면 대학에 진학해 성직자가 되는 길이 있었다. 법률가를 목표로 삼는 것도 좋다. 의사도 훌륭하다. 그러나 역시 워스처럼 상업적인 재능을 살리는 것이 벌이가 제인 좋았다. 해외 무역 상인이 가장 출세하기 쉬운 지름길이었다. 부를 쌓고, 땅을 사서 지주가 되는 것이 목표. 거기에 문장 사용 허가라는 훈장이 오면 더할 나위 없다. 물론, 그러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행운이 따라주는 사람뿐이었다.
 신분 질서에 얽매인 고통과 원통은 이 작품의 바탕에도 흐르고 있다. 셰이크와 워스가 고향을 떠난 것도, 런던에서의 성공을 지향하는 것도, 「명문가의 유력자」 Sir. 토마스 루시로부터 받은 굴욕이 원점이다. 그 굴욕이 말로에 대한 대항심을 낳고, 셰이크 일행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런던의 연극 세계에서 성공한 뒤, 고향에 땅을 사 모두에게 인정받는 유명인이 된다. 문장 사용도 신청해서 인정받는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한 셈이다. 셰익스피어에게도 명문가로 발돋음해 문장 사용을 인정받는 것은 큰 목표였을 것이다. 고향에 금의환향하기 위해 런던에서 고난을 견뎌내고, 사회 질서를 돌파해 저 높은 곳을 향하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해준 것이 바로 극장이라는 목조로 된 우주였던 것이다.

런던의 외국인

셰익스피어의 시대, 이미 런던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지방에서 많은 이들이 성공을 꿈꾸다 런던을 목표로 삼았고 외국에서도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당시 영국은 그 번화함과는 대조적으로 기술선진국이라곤 할 수 없었기에 직공이나 인쇄기술자, 요리사 등 뛰어난 기능을 습득한 장인들도 우르르 도버 해협을 건너왔다. 그런 장인들 중에는 종교상의 이유로 고국에서 쫓겨난 사람도 적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 지역에서 영국으로 도망쳐온 것이다. 장인으로서 실력만 있으면 외국에서도 먹고 살수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외국인이든 흔쾌히 받아들여졌느나, 라고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영국은 「외국인을 싫어하는」 나라로 유명했다. 육지로 이어져서 사람의 왕래가 쉬운 유럽 대륙과 달리 영국은 바다로 가로막힌 섬나라. 자연스레 바다 건너편 외국인과 자신들을 구별하는 의식이 강해졌다. 셰익스페어의 작품 속에서도 섬나라임을 자랑하는 구절이 있다. 좋든 싫든 간에 이는 섬나라 특성으로, 대륙 국가들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있음에 틀림없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는 그 수많은 외국 중에서도 스페인인에 대한 반감이 특히나 강했다.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데다가, 스페인은 가톨릭의 총본산과도 같은 나라. 「검은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스페인의 포학성은 과장되어 회자되고, 실제로 여왕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를 파헤쳐보면 그곳에는 스페인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그렇다면 흑인이나 황인종 등 피부 색깔이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당시, 영국인에 의한 노예 무역도 이루어져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었지만, 아직은 보기 드문 존재였던 것 같다. 상류 계급이 흑인을 하인으로 삼는 게 유행하긴 했으나 희귀하기 때문에 집안에 두는 ㅡ 그야말로 펫과 같은 감각이었다. 성서의 내용을 자신들이 편리하게 해석하였기에 흑인에 대한 편견은 예로부터 있었으니, 그 당시 영국에서도 유색 인종을 백인과 완전히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몇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오셀로」의 주인공인 기품있는 군인을 흑인(무어인)으로 설정했다. 이 설정이 관객들에게도 받아들여진 걸 보면 유색 인종이 백인보다 열등하다, 라는 근거없는 차별 의식은 아직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역병의 유행

2020년 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으로 연극과 콘서트가 중지되고 사람들에게 기분 전환과 치유를 가져다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역병에 굴한 형국이 되었는데 이와 같은 일은 셰익스피어의 시대에도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하기 얼마 전에는 독감으로 추정되는 병이 잉글랜드에 만연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당시 사람들 눈에는 옛날의 페스트와 똑같은 비참한 재앙으로 보였을 것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병원체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당시, 눈에 보이지 않는 병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의 마음에도 심각한 영향을 안겨주었다. 흉작이나 고르지 못한 기후 등도 포함해, 이러한 세상은 악마의 앞잡이인 마녀의 소행이 틀림없다, 라는 의심 때문에 마녀사냥이 성행하기 시작한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는 마녀사냥 시대이기도 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도 등장하는 마녀는 그 당시 사람들에게 실제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냥 두려움에 떨고만 있을 순 없다. 보이지 않는 병에 대처하기 위해 다양한 방책이 취해졌다. 사람이 밀집되어 있으면 병이 쉽게 옮는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었고, 공기가 오염되어 있는 것이 역병의 원인이라고도 여겨졌다. 전염병을 회피하려면 「밀폐, 밀집, 밀접」을 피하는 게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우르르 물리는 극장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장소라는 이유로 병이 유행할 조짐이 보이면 곧바로 폐쇄령이 떨어졌다. 유행의 조짐을 한발 먼지 감지하기 위해서 관료들이 날마다 사망자 수를 조사하고, 부자연스러운 증가가 보이면 역병을 의심했다.
역병이 유행하면, 극장뿐반 아니라 런던 같은 도시 자체가 「3밀」을 갖춘 위험한 장소라서 사람들은 교외나 시골 마을로 도망쳤다. 그런데 도망친 사람들이 병원체를 함께 끌고 가기도 해서 오히려 병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그림에도 도망치는 사람을 질병이 '놓칠 성 싶으냐'라며 쫓아가는 모습을 그린 것들이 있다.

재판과 처형

셰익스피어의 시대. 범죄자를 잡는 것은 지역 사람들이 꾸린 소위 '자경단' 같은 것이었다. 붙잡힌 범죄자는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소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다.
 종교적인 죄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교회 제판소」에서 심판받았다.
 비교적 가벼운 범죄나 지역적인 분란의 중재, 도로 관리, 생활 궁핍자의 구제와 같은 지금 같으면 행정에서 맡을 만한 문제도 다뤘던 곳이 1년에 4번 이상 열게 되어 있는 「사계 법원」이었다(사계라는 명칭이지만, 개최 시기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 사계 법원의 재판관을 맡는 것은 치안형사. 치안형사는 지주 등, 그 지역의 유력인사가 국왕으로부터 직접 임명되었는데, 꼭 법률을 배운 전문가라는 법은 없었다. 무급이지만, 국왕에게 임명되었다는 명예가 명사의 증표로서 중요했던 것이다.
 반역죄나 살인, 강간과 같은 중죄를 다룬 것은 「순회 재판」이었다. 이것은 런던에서 파견된 「왕좌 재판소」 등의 프로 법률가가 말 그대로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안건을 처리했던 것이다.
 사계 재판이든, 순회 재판이든, 1년 내내 열리는 건 아니라서 지방에는 재판소 건물이 따로 있지는 않았다. 재판이 열릴 때, 적당한 시설을 이용해 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관이 열리면 인근에서 많은 이들이 모여들어 약간의 축제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재판에서 유죄가 결정되면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데, 「성직자 특권」이라 불리는 기묘한 관습도 있었다. "성직자는 세속적인 권력에 의해 심판받지 않는다" 라는 교회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던 중세가 기원인데, 그것이 확대 해석되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은 성직자와 동등한 것으로 치부되어 죄가 경감되는 관습으로 변질되었다. 물론 강도 등과 같은 중죄에는 적용되지 않았고 행사할 수 있는 건 딱 한 번뿐이라 행사한 증거로 엄지에 낙인이 찍혔다. 그 나름의 제재가 있었던 셈이다.
 당시의 형벌은 채찍형이나 낙인, 귀 같은 신체 일부를 절단··· 하는 것처럼 현재에는 너무 잔학한 것들뿐. 그 밖에도 공개적인 처벌대에 구속해놓는 형벌도 있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목이나 팔다리를 나무틀에 고정시키고, 옥위에 세워두는 것이다. 행인들은 구경거리가 된 범죄자에게 멋대로 제재를 가할 수도 있어서 미움받는 사람은 투석 등으로 목숨을 잃을 우려도 있었다. 중죄는 사형인데, 서민은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도끼 등을 이용한 참수는 즉사하기 때문에 상류계급에게만 허락된 「온정적인」처형 이었다. 국왕에 대한 반역 정도 되면 「능지처참형」이 기다리고 있다.

퓨리탄

"이 구경거리를 보고 기뻐하는 자들에겐 반드시 천벌이 내릴 것이다!!"
"연극은 질서를 어지럽히고 신을 모독한다!!"
『7인의 셰익스페어』에도 가끔 등장해서 셰이크 일행의 연극을 비난하는 퓨리탄.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중에서도 엘리자베스 여왕의 종교 정책이 미지근하고 여전히 가톨릭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고 비판하며 교회의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구축한 교회에는 불순한(즉, 가톨릭적인) 요소가 많으니 그것들을 제거하고 좀 더 순수한, 좀 더 '퓨어한' 것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퓨어하게 만든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 이 이 '퓨리탄'이라는 호칭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들이 붙인 이름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퓨어하게 만들어라', '순수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외치며 교회를 공격하는 데에 반발감을 느낀 사람들이 그 '퓨어, 퓨어, 라고 시끄러운 놈들'이라는 모멸의 뜻을 담아 사용한 말이다. 참고로 퓨리탄들은 자신들을 '신앙심 깊은 자', '경건한 자'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그들의 눈에는 극장 따위를 찾아가는 사람은 신앙심이 부족하고, 신을 두려워하지 않고, 구원하기 힘든 놈들로 보였던 것이다. 여하튼, 퓨리탄은 축제나 극장 같은 오락, 갬블, 음주를 부정하고, 유행을 쫓아 패선에 관심을 갖는 것도 허례허식이라고 비난했다. 일요일에는 안식일을 지키며, 운동을 하거나 놀지 말고 집에서 조용히 성서를 읽어야 된다, 라는 것이 퓨리탄의 이상적인 생활이었다.
 영국은 퓨리탄의 전통이 있는 나라라고 설명되는 경우가 있는데. 퓨리탄은 소수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더 온화한 신앙심을 품고 있었다. 평범한 서민들에게 딱딱한 생활을 강요하려 드는 퓨리탄은 상당히 짜증 나는 존재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만, 전체적으로는 소수파였지만 런던에선 퓨리탄의 영향력이 강해 런던의 정치를 움직이는 경우도 있었다. 셰익스피어 일행의 연극 활동이 공격의 목표가 된 것에는 그러한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더 강력한 개혁을 요구하는 퓨리탄의 움직임을 엘리자베스 여왕도 위험하게 보았다. 국왕이 결정한 종교에 따르지 않는 것이 국가의 안정을 뒤흔드는 불온한 움직임으로 간주되기는 가톨릭 교도도, 퓨리탄도 마찬가지였다. 분파 활동을 추진한 '과격한` 퓨리탄은 붙잡혀서 처형당한 사람도 많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처형한 것은 비단 가톨릭교도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뉴게이트 감옥

"뉴게이트 감옥은 '교수대로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이라 불리는 데야"
옛날 영국 감옥이라고 하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가장 먼저 「런던탑」을 떠올릴 것이다. 템스강에 인접한 「반역자의 문」을 통해 배로 실려 들어가 탑 안에 있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는 영영 태양을 볼 수 없다ㅡ라는 이미지다. 하지만 런던탑은 본래 국왕이 사는 궁전이고, 감옥은 그 부속 시설에 지나지 않았다. 수감되는 것도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라서 일반 서민들이 들어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렇다면 「평범한」범죄자들은 어디로 들어갔던 것일까? 그 중 하나가 「뉴게이트 감옥」이었다. 원래는 그 이름 그대로 런던의 시문(市門) 「뉴게이트」가 감옥으로도 사용되다가 나중에 확장된 것으로, 그 역사는 12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절도나 상해 같은 경우, 죄의 무게에 따라 수십 일 동안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다만, 현대의 교도소처럼 식사가 주어지고 비이슬도 피할 수 있는 녹록한 세계가 아니었다. 식비 등의 경비는 실비가 징수되고, 지불하지 못하면 대우도 달랐다. 감옥 생활도 낸 돈에 따라 달라서, 돈만 있으면 「비교적」 나은 감방에 들어갈 수 있고 나름의 대우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감옥이기 때문에 빈말이라도 지내기 편했다고는 볼 수 없다. 수형자는 쇠사슬에 묶이고, 간수의 폭력과 갈취도 있다. 이가 대량으로 있는 곳에서 잠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형편이지만 간수 등에게 남몰래 음식을 살 수도 있었다. 중세에는 술조차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옥중 생활의 고통을 술로 잊으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건물은 탈옥을 방지하기 위해서, 도망칠 수 있은 만한 「구멍」은 창문도 포함해서 최대한 막을 필요가 있었다. 환기도 잘 안 되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다. 화장실처럼 버젓한 시설은 일반 가정에도 없던 시절, 감옥 안의 위생 상태는 최악이라 금세 전염병이 만연했다. 그 열병은 「감옥열」이라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수형 중에 그런 병으로 목숨을 잃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살인이나 강간과 같은 중죄를 저지르면 사형일 가능성이 높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의 경우, 간수의 주거구 바로 밑에 있는 방에 갇히고 오수가 흐르는 곳 옆에 쇠사슬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반성하라는 뜻이겠지만 처형당하는 날, 교수대가 있는 타이번(현재 하이드 파크의 북동쪽 귀통이 부근)까지의 긴 노정을 끌려가던 죄수의 심중은 어땠을까?

마녀

 셰익스피어의 시대 사람들은 다들 기독교 세계관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악마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악마와 계약을 맺고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마녀」의 존재도 믿었다. 마녀라고 하면 중세의 미신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 마녀사낭이 성행한 것은 근세고, 셰익스피어가 활약하기 시작한 바로 그 무렵에도 일종의 박해로서 절정인 시기였다.
 마녀로 몰린 것은 대부분 사회 안에서 훼방꾼 취급받는 노령의 여성들이었다. 사람들은 병이나 재해 등, 원인을 설명할 수 없는 불운을 마녀의 저주 탓으로 돌렸다. "가축이 죽은 것도, 태풍에 밭의 작물들이 망가진 것도, 동네에 살고 있는 저 가난한 늙은 여자(=마녀) 때문이며, 그에게 적선하는 걸 거절한 일로 외려 원한을 품고 마법을 건 것임에 틀림없다. 그 증거로 내 태소는 피해틀 입었는데, 저 인간 것은 멀쩡하지 않느냐" 라는 논리였다. 현대 같으면 꽃가루 알레르기도 마녀 탓으로 돌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저 인간은 태연한 얼굴로 잘 지내고 있다. 분명 마녀임에 틀림없다" 는 식이다.
 또한, 허브나 약초 등으로 민간요법을 베풀던 사람들도 그 신기한 힘 때문에 특히나 고회에서 위험한 존재로 간주되었다. 사람들의 심신을 구원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역한이었기 때문에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자는 마녀로 물린 것이다.
 점을 통한 예언도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미래를 말하는 건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라 여겨졌다. '신도 아닌 인간이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리 없으니, 그것은 악마의 힘을 빌린 것임이 틀림없다' 라는 논리다. 더욱이, 국왕의 운세를 점치는 것은 사회 불안을 조장하므로 반역죄로 간주되었다.
 마녀가 아닐까, 라는 의심이 쏠리면 잡혀가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면 다양한 피해가 제보되고, 목격 증언이 모인다. "더욱이 마녀라면 악마와 계약한 표식이 몸 어딘가에 있을 터, 표식을 찾아보면 거봐, 이런 곳에 점이 있잖아. 그 부분을 찔러도 아파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증거다. 분명 악행을 돕는 「심부름꾼 마귀」도 있을 것이다. 저 검은고양이가 그것임에 틀림없다. 깨끗한 물은 마녀를 싫어하니까, 마녀는 분명 물에 뜰 것이다. 거봐, 저 여자는 물에 빠지지 않고 떠 있잖아. 마녀라는 증거다! 자, 너는 마녀다. 동료의 이름을 대라" 라며 고문당하고 고통스러운 니머지 아무 이름이나 입에 올리게 된다. 이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속속 마녀로 내몰렸다. 종국에는 마녀사냥을 가업으로 삼는 수상한 패거리까지 등장하게 된다.
 일단 마녀라고 결정되면 처형이 기다리고 있다. 유럽 대륙에서 마녀는 무조건 화형인데, 영국에선 주로 교수형이었다. 교수대에 마녀로 몰린 무고한 인간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끔찍한 정경도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대의 모습 중 하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잉글랜드의 옥좌에 앉아있는 건··· 저주받은 운명을 가진 여자야!"
중세 유럽에서 신앙은 이거냐, 저거냐,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종교개혁으로 인해 분열되면서 신앙에 '선택'이 생겨난 것이다. 그 선택도 개인의 자유는 아니었다. 국민은 군주가 정한 신앙에 따른다. 이것이 기본적인 규칙이었다. 당연히
 군주가 어떤 신앙을 품고 있느냐는 종교개혁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지극히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국왕의 마음속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종교개혁을 시작한 헨리 8세도 가톨릭과 별차이 없는 신앙을 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종교 정책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를 오갔다. 요컨대, 신앙보다 정치적 판단을 우선시한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프로테스탄트의 맹주였던 앙리 4세가 프랑스 왕위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정치와 신앙이 모순될 때, 정치가 우선시되는 경우는 그리 드물지 않았다. 훗날, 엘리자베스 여왕과 적대하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조차도 한때는 프로테스탄트인 엘리자베스에게 구혼했고, 그 후에도 엘리자베스의 결혼 상대로 외국의 가톨릭교도들이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도 그 정책, 특히 외교에선 반 가톨릭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나 그 신앙의 내용은 상당히 복잡하다. 더 강력한 프로테스탄트화를 요구하는 퓨리탄에 대해선 처형도 포함하여 엄격하게 대응했고, 한편에서는 가톨릭에 대해선 여왕에게 공공연히 반기를 들지 않는 한 묵인한 적도 있다.
또한 여왕은 프로테스탄트라면 당연히 인정해야 되는 성직자의 혼인을 강경하게 반대해서 측근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심지어 궁정 예배당의 전속 음악가 자리는 대대로 가톨릭교도를 임명하고 다양한 특권을 부여하는 등 공공연히 보호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엘리자베스가 가톨릭교회를 용인할 수 있었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교회는 엘리자베스의 모친 앤과 헨리 8세의 결혼을 공식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톨릭 입장에선 엘리자베스가 정통 적자가 아니라 왕위를 인정할 수 없었다. 여왕 입장에선 설령 가톨릭교도에 공감을 하더라도 왕위를 지키기 위해선 가톨릭교회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마음속에선 신앙과 정치, 권력에 대한 집착 등 다양한 생각이 교차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전쟁의 시대

'연극을 즐기기 위해 민중들이 극장에 몰려갔다'라는 사실 때문에 셰익스피어가 활약했던 시대는 사람들도 활기넘치는 평화로운 시대였다는 이미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다양한 문화가 꽃핀 엘리자베스 시대를 「명랑한 잉글랜드」 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는 전쟁, 또 전쟁인 시대였다.
 여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그녀는 스코틀랜드로 파병해 내정에 간섭한다. 그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동맹국 프랑스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대립을 이용하고, 프로테스탄트 세력의 역성을 든 것이다. 그 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대립으로 종교전쟁의 혼란에 빠진 프랑스에도 개입해, 프로테스탄트 측에 원군을 보낸다. 프로테스탄트의 승리로 끝나면 설령 혼란이 길어지고 체제가 붙안정해진다 해도 잉글랜드에 대한 위험은 사라지니 당연히 좋은 일이었다. 그 당시 유럽에선 프랑스와 스페인, 양 대국이 패권을 경쟁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혼란에 빠지자 스페인과의 관계가 중요해진다. 
 가톨릭 세력의 맹주를 자처하는 스페인과 프로테스탄트인 잉글랜드가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긴 힘들었다. 양국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이 이끄는 사략선이 미대륙에서 은을 싣고 돌아오는 스페인 함대를 습격하고, 그걸 여왕이 묵인하자 스페인은 분노가 쌓여갔다. 사략(私掠)이란 외국 함선을 공격해 화물을 빼앗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니, 요컨대 여왕이 공인한 해적인 셈이다. 더욱이 스페인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네덜란드에서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여왕은 이를 군사 지원한다.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의 주요 산업이었던 모직물의 중요한 거래처였기 때문에 경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페인 세력을 제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네덜란드를 무대로 한 스페인과의 대립이 전면전쟁으로 발전하여 끝내 무적함대의 습격을 초래한다.
 스페인과의 전쟁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에 쓰이는 전비(戰費)가 재정을 압박하고 또 다시 공격해올지도 모르는 스페인의 위협은 사회에 불안을 안겨주어 엘리자베스 여왕의 말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사람들이 감동했을 때 잉글랜드는 전시 중이었고 「명랑」과는 정반대인 정세었다. 전쟁의 불안감을 한때나마 누그러트리기 위해 사람들은 극장을 찾아간 것인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

"런던을 떠나 당분간 논서치 궁전에 체류합니다. 하지만 내일부터 여왕 폐하와 시녀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살았던 성으로 작품 속에는 논서치 궁전이나 화이트홀 궁전, 런던 탑 등이 등장한다.
어느 것이 여왕의 본거지일까?
 사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러 개의 성을 이동하며 거주했다. 이것은 중세 이후의 관습이었다. 중심이 되는 거성에서 전국을 지배하는 것은 당시의 통치 조직으로는 힘들었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각지로 나가 문제를 심판하고, 불온한 움직임을 억제해야 했다. 성은 단지 평소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유사시의 방위 거점이자 주변 지역을 엄중히 관리하는 전선기지이기도 해서 국왕의 권위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논서치 궁전은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가 지은 성인데, 그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지은 샹보르 성(현재는 세계유산)을 의식하며 『그 이상』을 지향한 것이었다. (논서치란 '견줄 것이 없다'라는 뜻. 안타깝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성이 여러 개 있고, 국왕이 이동한다는 것은 궁정도 같이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궁정 관료나 시녀, 호위 병사부터 의상 담당이며 요리사에 이르기까지, 여왕의 일상생활을 지탱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수백 필의 말에 짐을 신고 이동하는 것이다. 이 이동도 여왕에게는 중요한 퍼포먼스의 기회였다. 사람들에게 길게 이어지는 호화로운 행렬을 보여 주는 것이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행렬이 끝날 때까지 길을 횡단할 수 없기 때문에 갈 길이 급한 사람들에겐 민폐가 따로 없었다.
 영국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왕은 지배 지역을 이동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그 관례를 멈추고 한 곳에 머문 것이 엘리자베스의 라이벌, 스페인의 펠리페 2세였다. 중세 이후의 고성은 군사 거점으로서의 면모를 중시하며 지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전체적으로 관리는 잘 되어있지만, 결코 살기 편하다고는 볼 순 없었다. 펠리페는 자신이 지은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에 머물면서, 거기서 지령을 내리며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다. 이러한 정착 패턴은 17세기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조영하면서 유럽 전역 왕후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 그 모델을 따르지 않은 것이 영국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영국 여왕은 여기저기 성을 이동하고 있다. 여왕은 버킹엄 궁전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 또한 전통의 나라 영국다운 일이다.


웨스트민스터의 교회

 웨스트민스터는 사원(에비)이나 국회의사당이 있어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장소다. 지금은 런던의 일부처럼 여겨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웨스트민스터는 런던과는 다른 도시로 셰익스피어의 시대, 두 도시 사이에는 논과 발이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 해도 매우 가까위서 왕래는 힘들지 않았고, 궁전도 지어져 있었다. 현재의 국회의사당도 정식으론 『웨스트민스터 궁전』이고, 궁전을 의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웨스트민스터라고 하면 11세기에 건축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역대 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수많은 국왕의 묘소가 있는 왕실과 관련된 교회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이 교회에 매장되어 있다. 국왕의 직속 성당이라 해도 좋을 만큼 격식 있는 교회라, 셰이크 일행이 처음 웨스트민스터로 오라는 말에 놀라고 긴장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셰이크 일행이 여왕과 대면한 것은 세인트 마가렛 교회. 웨스트민스터 사원 부지 안에 있는 교회다. 원래 수도원이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지역민들이 모이기 위한 교회가 아니고, 실제 지역 교회로 사용된 것은 세인트 마가렛 교회였다. 현재의 성당은 1523년에 제건된 것이고.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 가톨릭 시대에 성당으로 지어진 런던의 마지막 교회였다. 셰익스페어가 극작가를 은퇴한 이름해(1614년). 세인트 마거릿 교회는 웨스트민스터 궁전, 즉 의회를 위한 교회가 되었다. 이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어, 의원들이 예배하러 찾아오는 것도 이 교회다. 당연히 귀족이나 상류계급, 국회의원 등과도 관련이 깊어 시인인 밀턴과 처칠도 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사실, 웨스트민스터에는 한 곳 더 중요한 교회가 있다. 바로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다. 앞에서 말한 두 교회와는 좀 떨어져 있지만, 비잔틴 양식의 붉은 벽돌에 하얀 줄무늬가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영국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다. 다만, 셰익스페어는 이 교회를 본 적이 없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이 건축되기 시작한 것은 긴 고난의 시대를 뛰어넘어 비로소 가톨릭 신앙이 허용된 후 19세기 말의 일이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자금난 때문에 여전히 미완성인 부분이 남아있다.

백년 전쟁

"잉글랜드의 반격이 시작되니까··· 잔 다르크는 마력을 잃고"
잔 다르크가 무대를 누비며 잉글랜드 군을 농락한다. 셰익스피어의 출세작 「헨리 6세」의 볼거리다. 이 배경이 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바로 「백년 전쟁」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전쟁을 무대로 「헨리 5세」라는 명작도 썼다.
 이 전쟁의 발단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모친이 프랑스 왕녀였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이야말로 프랑스의 정통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나서며 비롯되었다. 모계 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중간에 휴전을 하면서 말 그대로 100년이 넘는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의 원인은 왕위 계승권 다툼뿐분만 아니라,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영내에 갖고 있던 영지를 둘러산 싸움, 플랑드르(현재의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모직물 산업을 둘러싼 이권 대립과 양국 안에서의 내분 등 복잡한 것이었다.
 싸움은 좀처럼 결착이 나지 않았는데, 전쟁 후반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가 압도적인 승리를 하며 화친 조약이 맺어진다. 프랑스 왕의 딸이 헨리에게 시집오고, 장차 태어날 자식들이 양국의 왕이 되기로 정해진다. 그 자식이 바로 헨리 6세다. 참고로, 이 프랑스 왕녀가 훗날 재혼한 상대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선조에 해당하는 오언 튜더 즉, 엘리자베스 여왕은 프랑스 왕가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영국이 승리한 상황을 한 번에 바꿔놓은 것이 잔 다르크다. 화친을 반대하던 왕태자를 지지하며, 함락 직전이었던 오를레앙을 해방시키고, 열세를 뒤집었다. 잔은 붙잡혀 처형당했지만, 그 후에도 형세는 바뀌지 않아 잉글랜드군은 프랑스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잔 다르크의 묘사 방식. 셰익스피어는 그녀를 마녀로 그렸다. 그녀는 당시 영국인들에게, 영국을 패배로 몰아넣은 끔찍한 적이었다. 본래 프랑스군에게 질리 없는 잉글랜드가 패배한 것은 악마의 초자연적인 힘 때문인 것으로 치부한 것이다.
 사실, 잔은 프랑스에서도 오를레앙 외에 다른 곳에선 그다지 유명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존재를 부각시킨 것이 나플레옹이다. 영국을 비롯한 대외 전쟁 속에서 프랑스를 구한 영웅으로 치켜세운 것이다.
 백년 전쟁의 결과, 영국 국왕과 귀족 등은 프랑스에 갖고 있던 영토를 거의 잃게 되었다. 그 반면, 그 전까지는 애매했던 「국가」라는 의식이 강해졌다. 연극 관객들이 무대 위 잉글랜드 군을 진심으로 응원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2025/10/05 12:19 2025/10/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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