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아돌프 아이히만(독일어: Otto Adolf Eichman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6월 1일)의 재판을 일종의 리포트 형식으로 정리한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난 아이히만은 1932년 나치의 등장 후 나치당에 가입하여 친위대로 활동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하지 않았던 그는 졸업후 여러회사를 전전하며 일하는 동안 나치당의 신문을 접해 읽기 시작했다. 신문을 통해 아이히만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해체, 베르사유 조약 조건 거부, 급진적인 반-유대주의와 반-볼셰비키 등을 접하게 되었고, 나치당은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 게르만족을 위한 레벤스라움, 인종에 기반한 국가 공동체 형성, 유대인 시민권 박탈과 적극적인 탄압으로 인종 청소를 약속했다.

1934년 베를린에 본부를 둔 부서 Section II/112에 합류하여 유대인 관련 조직과 시온주의 운동들에 대해 보고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이를 연구하기 위해 히브리어와 이디시어를 배우기까지 했고, 결국 나치당 내에서 유대인 문제와 시온주의에 대한 전문가로 명성을 얻었다.

1938년부터는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의 책임자로 일하게 되었다.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 즉 홀로코스트 실행을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아래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동유럽의 게토와 학살 수용소로 강제 추방하는 것을 촉진하고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은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학살 정책의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나치는 우선 이들을 강제 이주하려고 했으나, 해당 정책의 성과가 여의치 않자 유대인 거주 지역인 게토(ghetto)를 만들어 사람들을 몰아넣는 강제 격리,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 말살시키는 집단 학살 정책을 차례대로 펼쳤다. 이 과정에서 아이히만은 매사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그의 상관이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로 말이다. 1944년 3월에 나치 독일이 헝가리를 침공했을 때도 아이히만은 그 지역의 유대인들을 절멸 수용소로 추방시키는 것을 감독했다. 아이히만이 추방한 대부분의 추방자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75%가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1941년 9월 중순에 아돌프 히틀러가 그에게 독일이 통제하는 영토의 모든 유대인 학살을 명령했다고 한다. 히틀러의 초기 계획은 소련을 모두 정복하고 그 지역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에 대한 동방총계획(점령된 동유럽과 소련 지역의 인구를 어떻게 할 것인지)을 실행하는 것이었으나, 12월에 미군이 참전하고 독일이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하자, 결국 전쟁이 끝난 후가 아니라, 즉시 유럽의 유대인을 학살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5월 독일 패망 후 전범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기 시작했다.
아이히만도 마찬가지였다.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아이히만은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독일 전역에서 도망쳐 다녔다.
초기에는 독일의 산골 마을에 들어가 벌목공 행세를 하며 지냈고, 포위망이 점점 좁혀오자 이탈리아를 거쳐 1950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다. 그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았고, 이후 1952년 자신의 가족들을 아르헨티나로 불러들이고  1960년에는 집을 지어  이사가는 등 풍요롭게 생활했다. 하지만 결국 신분을 들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자신을 둘러싼 위협이 모두 사라졌다고 판단해 아르헨티나로 도망온 나치 잔당들과 어울리다가 결국 꼬리를 밟힌 것이다.
아이히만은 1960년 5월 11일,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었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등 유대인을 강제 추방한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전체주의적 총통 체제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62년 6월 1일에 교수형에 처해져 사망했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아이히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아이히만이 증오도 죄의식도 드러내지 않는 평범한 성격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지몬 비젠탈은 1988년 출판한 책 《Justice, Not Vengeance》에서 "세계는 이제 "책상 살인자"의 개념을 이해한다. 우리는 수백만 명을 죽이기 위해, 광신적이고, 가학적이거나, 정신병자가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의무를 완수하려는 충성스러운 추종자면 충분하다."라고 썼다. "작은 아이히만"이라는 개념은 조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관료들을 경멸하는 개념이 되었다.

베티나 스탱네스(Bettina Stangneth)는 2011년 자신의 책 《Eichmann Before Jerusalem》에서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서 윌리엄 사센과 인터뷰한 내용을 근거하여, 아이히만이 이데올리기적으로 동기 부여된 반유대주의자이자, 평생 나치에 헌신한 당원이었으며, 재판에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관료였다고 말했다.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Christopher Browning), 데보라 립스타트(Deborah Lipstadt), 야콥 로조윅(Yaacov Lozowick)과 데이비드 새자라니(David Cesarani) 등의 저명한 역사가들도 스탱네스의 주장에 동의했고, 이는 한나 아렌트가 믿었던 (아이히만이) 생각이 없는 관료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2024/07/08 16:03 2024/07/0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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