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아일랜드 갈등

2024/04/19 11:33

# 아일랜드 섬은 청동기 시대부터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다.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해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다.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했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아일랜드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영국이 필요로 하는 밀, 소, 돼지를 키워서 영국에 수탈당하는 플랜테이션 체제였다. 현지 정치체제를 해체하고 플랜테이션을 강제한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였다.

# 영국에선 아일랜드인을 아프리카의 흑인과 같은 수준의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하얀 흑인(또는 하얀 침팬지)"이라 부르며 멸시했고 걸핏하면 납치해서 계약제 하인, 즉 노예로 사고 팔았다.

# 영국과 아일랜드의 갈등은 종교, 문화, 민족,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결합된 복합적이고, 시대적 여건에 따라 변화해 온 다이너믹한 관계이며 일차원적인 민족적 '타자'의 억압과 핍박의 관계로만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하지만 영국은 공공연하게 아일랜드를 차별했고 이에 분노한 아일랜드 민중은 아일랜드인이라는 민족 의식을 가지고 영국에서 독립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정세에 따라 독립을 쟁취했지만, 북아일랜드가 영국에 잔류하면서 아일랜드 섬은 남북으로 쪼개졌다. 독립 이후에도 북아일랜드를 두고 분쟁을 벌였으며 1973년에 영국과 공동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했지만 이후 피의 일요일 사건 등 무력충돌을 겪었다.
- 아일랜드는 중세시대부터 수백년간 계속 잉글랜드의 지배를 받고 잉글랜드의 한 지방으로 취급받았는데도, 영국이 선도한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나마 공업화가 조금 진척되었던 벨파스트와 북아일랜드 지역은 계속 영국령으로 남았다.

# 아일랜드어로 로칼Rocal 혹은 로카바리Rocabarraigh, 영어로는 로콜Rockall이라 불리는 대서양의 작은 바위섬을 영국이 자기네 EEZ로 집어넣으려 하여 갈등을 겪고 있다. 분쟁의 소지가 있지만 문화적, 역사적으로는 명백한 아일랜드의 영토였기 때문에, 반영감정의 원인 중 하나이다.

# 2022년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붕어하자 미홀 마틴 총리가 영국에 추모의 메세지를 보냈다. 그러나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운데 8일 아일랜드와 스웨덴의 유로파 컨퍼런스 리그 경기에서 관중들은 “여왕이 죽었다”(Lizzy’s in the box, in the box!)라는 가사를 넣어 노래를 불렀으며 아일랜드 네티즌들은 ‘우리가 간다’(HERE WE GO)는 해시태그를 달고 엘리자베스 2세의 죽음을 축하하며 조롱하는 반응들을 내보였다.

# 북아일랜드 IRA의 무장 투쟁에 대해, 자치권을 획득한 20년대 중반부터 줄곧 비협조적이었으며, 아일랜드 내에서 IRA의 활동과 지원을 아일랜드 정부가 전면 금지하자 이에 실망한 일부 IRA 과격파들이 아일랜드에서 군자금 탈취를 위한 은행강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아일랜드 경찰이 IRA 단원들을 체포하여 수감한 일도 있을 정도. 이런 흑역사 과거사로 인해 현재도 북아일랜드 신페인당과 아일랜드 정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하며, 아일랜드 통일에 양측이 소극적 입장으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아일랜드 대기근 Irish Great Famine 1845 ~ 1852
- 감자 역병을 보낸 건 물론 신이었지만, 그걸 대기근으로 바꾼 것은 잉글랜드인들이다. - 존 미첼 John Mitchel
-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농장은 대규모의 감자 역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졌다. 감자 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다. 아일랜드는 일부 지역 외에는 철도 등 운송,유통 수단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들어온 식량의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만 유통되었다.
- 영국 정부의 수탈로 인해 아일랜드에는 감자 이외에 먹을 것이 거의 없던 와중에 감자가 병들어 버렸다. 아일랜드 구제방안은 영국 상원과 하원의 끝없는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여 참사가 일어났다. 100만여 명이 아사했고 또다른 100만 명이 기근을 피해 이민길에 올라 기근이 끝날 시점에는 총 인구의 25%가 없어졌다.
- 아일랜드의 기후는 극히 불안정하여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고 영국 정부의 곡물 수탈과 더불어 인구가 불어나서 먹을 게 부족해진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 이후  미국으로 가는 이민이 급증했고 도착 후에는 이탈리아계, 아프리카계들과 함께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북군에 동원되어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증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 지금의 영국 젊은 세대들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사에 대해 학교에서 잘 배우지 않았기에 어렴풋이 아는 정도이다. 아일랜드인은 역사에 대해 잘 설명하지만, 영국인은 아일랜드에 대해 상당히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

아일랜드 독립 전쟁 Irish War of Independence  1919-1921
# 아일랜드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 정부에 대항해 1918년에 만들어진 아일랜드 공화국군이 일으킨 게릴라전으로, 영국에서는 영국-아일랜드 전쟁 The Anglo-Irish War 으로 불린다.
- 신 페인(Sinn Féin)당과 IRA를 주축으로 한 아일랜드 독립운동
- 처음에는 아일랜드인 대다수가 거부반응을 보였으나 영국 정부가 보여준 광범위하고 잔악한 테러행위를 마주했을 때 그들은 곧 폭력행위에 동참했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 민간인들을 향해 이유없는 총격을 가해 사람들을 숨지게 했고 닥치는 대로 아일랜드인들을 잡아들였다. 또한 영국군은 아일랜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과 농장들을 불태웠다. 폭력은 서서히 퍼져나갔으나 1920년이 되었을 때 폭력은 당연한 것이 되었다. IRA의 주요 공격 목표는 아일랜드에서 영국 정부의 눈과 귀를 담당하고 있던 왕립 아일랜드 보안대 RIC 였다. IRA는 아일랜드 국민들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고 아일랜드 국민들은 RIC와 영국군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 했다.
- 이 전쟁에 참가한 아일랜드 공화국군은 '옛 IRA'로 불러, 후에 같은 이름으로 출현한 급진주의 IRA와 구별하고 있다.

아일랜드 내전 1922-1923
# 아일랜드 자유국에서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받아들여 성립된 아일랜드 자유국 국방군과 이를 반대한 조약 반대파 IRA(= 먼스터 공화국) 사이에 진행되었던 내전. 얼마 전까지도 동지이자 친우였던 상대의 목숨을 노리며 서로 증오해야만 하는 비극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한국전쟁만큼 대립이 심각한 내전이었다.
- 아일랜드군의 집요한 테러, 암살, 기습 게릴라 작전에 학을 뗀 영국은 결국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하여 아일랜드를 자치령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불완전한 내용으로, 완전 독립을 원하던 대다수의 아일랜드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았다. 아일랜드인들의 생각으로는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완전한 독립을 이룰 수 있을텐데, 고작 이따위 대접이나 받으려고 싸움을 멈추다니 말이 돼?' 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일제강점기의 경우로 대입해 생각하면 된다.
- 대영 저항운동을 벌이던 IRA 조직은 인적, 물적 자원에서 거의 한계에 달해 있었기 때문에 IRA를 이끌던 마이클 콜린스를 위시한 독립전쟁을 이끌던 지휘부는 '완전 독립을 위한 일시적인 조약이다. 이것을 발판삼아 완전한 독립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책이다.' 라는 식으로 맞섰다.
- 아일랜드 의회는 근소한 차이로 이 조약을 비준했고, 이에 대해 당시 아일랜드 대통령직에 있던 에이먼 데 벌레라는 조약에 반대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의회를 나와 조약 반대파인 자신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신 페인당을 이끌며, 자신들이야말로 아일랜드의 정통 의회라고 주장하며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와 의회를 배신자로 규정했다.
- 아일랜드 자유국측은 영국군으로부터 무기를 지원받아 중화기를 갖추었으며, 이 때문에 원래부터 수적으로도 불리했던 IRA측은 상대가 되지 못해 시종일관 압도했다.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 독립전쟁 당시 영국측의 주요 요인에 대한 암살을 수행하기 위해 육성했던 'The Squad'라는 부대는 내전 당시 'Dublin Guard'로 재편되어 조약 반대파에 대항해 싸울 때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조약 반대파들에게 가혹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조약 반대파들에게는 'Green and Tans'라고 불리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IRA 조직은 이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불법임을 주장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심해진 얼스터 신교도들의 북아일랜드 거주 가톨릭 교도에 대한 탄압과, 결정적으로 이 분쟁을 막기 위해 왔던 영국군이 저지른 피의 일요일 사건에 의해 다시 지지를 얻게 되어 1990년대까지도 활발한 저항 활동을 벌였다.

북아일랜드 분쟁 The Troubles 1960's - 1998
아일랜드가 독립했지만 북아일랜드가 영국 땅으로 남자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아일랜드 민족주의 진영과 개신교-친영국 진영이 일으킨 분쟁. 이후 벨파스트 협정에 이르게 된다.
- 북아일랜드는  개신교도가 많아 영국령으로 남았다.  
- 북아일랜드 분쟁의 결과로 30여 년간 3,5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 북아일랜드의 민족주의 진영은 IRA에 가담해 테러를 벌였고 영국 연합주의 세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 이주 영국인 VS 토착 아일랜드인
- 개신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은 영국 잔류를 희망하고 영국 국기를 건 반면
- 반대로 아일랜드인은 독립국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바라고 아일랜드 국기를 걸었다.
- 영국은 '개신교도 VS 가톨릭교도의 종교 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아일랜드인들은 '식민 VS 반식민의 이념 분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신교 vs 구교, 왕당파 vs 공화파, 연합주의 vs 아일랜드 민족주의 ... 등 다양한 종교, 이념, 사상 갈등
- 수도인 벨파스트는 개신교 지역과 가톨릭 지역이 벽으로 확연히 나뉘어 있는 분단된 듯한 도시로 거리 곳곳에 지지 정파를 드러내는 벽화가 그려져 있어 영국의 다른 지역과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 좌우 이념 갈등도 있어서 대개 영국 충성파는 우익이고 반대로 독립파는 좌익이다. 신페인도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많이 미는 등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은 예나 지금이나 좌익 성향이 있다.

# 피의 일요일 사건 Bloody Sunday 1972
1971년에 영국 정부는 북아일랜드 전역에서 IRA 관련자들을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1972년 1월 30일에 런던데리에서 아일랜드계를 위주로 이러한 영장 없는 체포에 반대하는 집회가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이 비무장 시위대와 민간인들에게 발포하여 14명이 사망하고 15명 이상이 부상당한 사건.
- 사건이 일어난 지역인 데리시 보그사이드의 지명에서 따와 보그사이드 학살 Bogside Massacre 이라고도 한다.  
- 이 사건은 당시 인기를 잃어 가던 IRA 과격파에게 명분을 제공하여 이들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후에도 영국군의 진압이나 소탕작전으로 무고한 북아일랜드 주민들이 죽어나가고 이로 인하여 유족들이 IRA에 들어가거나 소년병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 영국 정부는 오랜 시간 이 사건을 은폐함과 동시에 정당화해 왔다. 그러다 북아일랜드 분쟁이 사그라들고 벨파스트 협정이 체결된 1998년에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피의 일요일 사건의 재조사를 명령했고 이에 따라 당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이른바 '새빌 보고서' 작성을 통해 12년간에 걸쳐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마침내 2010년 6월 15일에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에 의해 이 사건이 비무장 시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임이 공식 인정되었고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 벨파스트 협정 (성 금요일 협정)
북아일랜드 분쟁을 종결하기 위해 1998년 4월 13일 영국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북아일랜드의 8개 정당이 맺은 협정과,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체결된 협정. 북아일랜드 자치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했다.
- 협정이 체결된 날이 하필 부활절 이틀 전인 성 금요일(聖 金曜日, Good Friday)이었기 때문에 성 금요일 협정이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주로 성 금요일 협정이라고 부른다.
- 1998년 5월 22일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양측에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북아일랜드 투표자의 71%가 향후 국민투표로 다수가 동의할 경우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으며 또한 위임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독립국 아일랜드는 94%의 동의로 아일랜드 섬 전체의 영토에 관해 권리를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 1999년 11월 29일 북아일랜드에 연립정부가 들어서고 영국의 직접통치가 중단됐다.  
- 2005년 7월 IRA는 공식적으로 무장해제를 선언했고 2007년 여름에는 영국군의 90%가 북아일랜드에서 철수했다. 2007년 3월 민주연합당의 이언 페이즐리와 신페인당의 게리 애덤스가 만나 공동정부 구성에 합의하면서 비로소 평화가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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